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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7]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순천 '선암사(2)
  • 박광준
  • 등록 2022-10-11 23:18:08
  • 수정 2024-04-02 03: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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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지난호에서는 선암사의 중심법당이자 핵심영역인 대웅전 영역을 살펴봤다. 대웅전과 만세루가 마주보는 가운데 마당에는 석탑 2기가 쌍탑으로 서 있고 동, 서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ㅁ자 형태로 모여 있고, 대웅전 동쪽에는 지장전이, 서쪽에는 응향각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곳이다. 이번회에서는 대웅전 뒷편으로는 조사전(祖師殿), 불조전(佛祖殿), 팔상전(捌相殿)이 나란히 세워진 가운데 원통전, 첨성각, 장경각이 그 뒤로 감추듯 숨어 있는 곳을 살펴볼 예정이다.


# 원통전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지은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통일신라 경문왕 1년(861) 도선국사가 세워 선암사라 이름지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고려 선종 5년(1088)에 의천이 새롭게 고쳐 세웠으나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버렸다. 그 뒤 여러 스님이 건물들을 세우고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 원통전은 조선 현종 1년(1660)에 경준, 경잠, 문정대사가 처음 지었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고쳐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24년(1824)에 다시 고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설치한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기둥 사이에는 꽃받침 모양의 재료를 놓아 그 위쪽의 재료들을 받치고 있다. 건물 앞쪽으로 기둥 2개를 내어 건물 평면이 T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보조 기둥(활주)이 지붕 추녀 부분을 받치고 있다.


선암사 원통전은 아담한 크기의 건물로 사찰건축에서 보기 드문 T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어 주목 받는 건물이다.


# 팔상전 


조계산에 위치한 선암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5)에 도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절의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고 면이 평평한 돌이 있는데 신선들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절의 이름도 이곳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유재란(1597)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 24년(1698)에 약휴대사가 다시 지은 후, 순조 24년(1824) 해봉대사·눌암대사 등이 다시 지었는데 팔상전도 이때 지은 것이다.


선암사 팔상전은 석가여래의 생애를 묘사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고,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계이다. 원래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계 건물이던 것을 나중에 수리하면서, 앞면의 공포만 다포양식으로 바꾼 것으로 보여진다. 내부에는 팔상도 외에 도선.서산.무학.지공.나옹 등 우리나라 고승과 33조사(祖師)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불조전


불조전/사진-문화재청 

순천 선암사 불조전은 정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사역내의 여러 전각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건립된 조선후기 건물로 건립 연대에 관한 자료가 확인되고 가구는 보조가구재를 채용해 구조적 안정성을 증대시켰고, 공포는 출목익공의 중요한 사례로써 사내 다른 전각의 것과 함께 건축학적으로 충분한 연구가치가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장경각



원통전의 뒤켠에서 왼쪽으로 비켜난 곳에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짜리 팔작지붕집인 장경각에서는 특히 돌계단 소맷돌 부분에 조각된 해태와 사자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 삼인당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삼인당은 길이와 너비 2.2:1의 비례를 갖고 있으며 연못 내에 길이 11미터 너비 7미터의 긴 계란형 섬이 있다. 그 형태는 타원형으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직선적인 사각형 연못의 양식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 각황전 


선암사는 지었을 당시의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고, 고려 선종 6년(1088)에 의천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으로 통일신라 경문왕 원년(861)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돼 현종 1년(1660)에 복원했고, 다시 영조 36년(1760)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각황전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규모는 작으나 화려한 멋을 지닌 건물이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민 천장을 설치했고, 처음 지었을 당시 만들었던 철불을 1900년경에 석고로 도색을 해 모시고 있다.


조사당

삼성각#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


만세루를 옆으로 돌아들면 대웅전과 설선당, 심검당이 만세루와 함께 안마당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앞마당에 서 있는 동서 삼층석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외관상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두 기의 삼층석탑은 높이 4.7m이며 보물이다.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사진-문화재청 두 석탑은 외관상 모양과 크기가 거의 같다. 지붕돌 위에는 호형과 각형 두 단으로 이뤄진 몸돌 받침이 있는데 이는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동삼층석탑은 외관상 서탑과 거의 동일하나 일부 부재가 본래의 것이 아니다. 1986년 해체 복원 때 초층 몸돌에서 사리장신구가 발견된 바 있다.


# 선암사 동종(2008-1) 


높이가 120㎝에 이르는 비교적 대형 작품에 속하는 이 종은 종신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1700년(강희 39) 조계산 선암사 대종으로 800근의 중량을 들여 개주(改鑄)한 것이라 기록돼 있지만 이 때 새로이 주조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김상립(金尙立)의 아들 김수원(金守元), 도편수(都片手) 김성원(金成元), 부편수(副片手) 김효건(金孝建), 김성원의 아우 김섬태(金暹泰) 등 18세기에 활동했던 김상립과 그의 아들 등의 이름이 나열돼 있어 당시 김상립을 중심으로 한 사장계(私匠系)의 활동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첫 번째 작품으로 의미가 깊다.


선암사 동종(2008-1)/사진-문화재청 이 종은 종의 형태가 조선후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 활기찬 쌍룡뉴와 연곽대, 보살상과 왕실 안녕을 기원하는 문구가 담겨 있는 전패 등 각 부의 문양이 섬세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형성을 잘 갖췄다. 


# 순천 선암사 동종(2008-2)


현재 남아있는 동종들은 신라시대 주조된 동종들도 많이 있지만, 상당수가 고려시대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불교가 부흥하면서 순천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다수의 동종이 제작됐다. 순천 선암사 동종(2008-2)은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는 대원사 부도암에서 처음 주조된 이후, 어느 시기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순천 선암사의 대각암으로 이전됐다. 현재 선암사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명문에 의해 1657년 5월 주조됐었음을 알 수 있다.


순천 선암사 동종(2008-2)은 종신이 상부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형태로 제작되어 전체적으로 유려한 인상을 주고 있다. 종신 상부를 구성하고 있는 천판에는 한가운데에 두 마리의 용이 머리와 발을 딛고 일어나는 모습을 이루고 있고, 몸체를 높이 들어 종고리가 형성되도록 했다. 또한, 꼭대기에 여의주가 올려져 있어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조각 기법을 보인다. 천판 외곽에는 연잎을 장식하고, 그 안에 1자씩 범자[pa 또는 ca]를 새겼다.


종신의 상대에도 사각형을 구획해 그 안에 상하로 2자씩 범자[oṃ ma]를 배치했다. 종신 상부에는 유곽을 배치하고 그사이마다 보살입상을 조각해 공양의 의미를 더했다. 종신 하부에는 위패형 문양을 마련해 그 안에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세저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라고 새겼다.


선암사 동종(2008-2)/사진-문화재청 또한, 세로로 쓴 명문 “전라도보성군 지천봉산대원 사부도암중종 이백근 순치십사년정유 오월일주조 장김용출(全羅道寶城郡 地天鳳山大原 寺浮屠庵中鍾 二百斤 順治十四年丁酉 五月日鑄造 匠金龍出…)”을 좌우로 넓게 새겨 조성 시기와 장인, 후원자 등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종신의 하대에도 일정한 공간을 마련해 그 안에 연화 당초문을 가득 장식했다.


순천 선암사 동종(2008-2)은 천판의 문양 기법과 용뉴[범종의 가장 위쪽에 있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 이곳에 쇠줄을 연결해 종을 매닮]의 제작 기법 등은 중국 동종의 특징을 보이고, 종신은 한국 동종의 전형적인 양식이 적용됐다. 이처럼 조선과 중국은 동종의 제작 기법과 양식이 복합적으로 적용됐다. 


# 선암사 설암매 


순천 선암사 경내에는 수령이 350~650년에 이르는 오래된 매화나무 50여 그루가 서식하고 있다. 담장을 따라서 피어난 23그루 매화나무는 3월 말경에 만개헤 장관을 이룬다. 이들 매화나무를 가리켜 선암매(仙巖梅)라고 부른다. 선암매 여러 나무들의 높이는 5~12m까지 다양하다. 이들 중 흰 매화 1그루와 분홍 매화 1그루가 2007년 11월 26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됐다.


순천 선암사 설암매/사진-문화재청 매실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각지에 심어오던 관상용 자원식물이고 이른 봄 피어나는 단아한 꽃과 깊은 꽃향기로 시.서.화 등에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우리 조상들의 사랑을 받아온 식물이고, 선암사의 무우전과 팔상전 주변 20여 그루의 매화 중 고목으로 자란 백매와 홍매 2그루는 아름다운 수형과 양호한 수세를 보이고 있고, 고려 때 중건한 선암사 상량문에 바로 옆의 와룡송과 함께 매화 관련 기록이 남아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나무이다.


# 순천 선암사 측간


순천 선암사 측간(順天 仙巖寺 厠間)은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에 있는 화장실로, 2001년 6월 5일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됐다.


선암사의 대변소 건물로 일주문과 범종루를 지나 대각암 가는 길에 있는 해천당 옆에 위치해 있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했던 것을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해 대가람을 이뤘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됐다.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건물은 북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옆으로 분리돼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을 하고 있다.


출입구에 설치된 풍판은 이 건물의 특징으로, 풍판 아래부분의 가운데와 양 끝을 약간 들린 곡선으로 처리했다. 이렇게 곡선으로 처리된 입구의 모습은 아름다운 곡선미를 보여주는 한편 드나드는 사람의 머리높이를 생각해 배려하고 있는 듯하다. 범종루와 이 건물이 있는 해천당 사이에는 지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여 상부층과 하부층으로 지혜롭게 분리해 이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짜임새도 튼튼하고 옛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보존 상태 또한 비교적 좋은 편이다.


선암사의 측간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920년 이전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남 지방에서 이와 같은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측간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그 가치가 높다.


# 순천 선암사 중수비


순천 선암사 중수비(順天 仙岩寺 重修碑)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에 있는 석비이다.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됐다.


선암사 중수비/사진-문화재청 선암사 무우전 뒷편인 북암에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버린 절을 약휴대사의 노력으로 힘들게 복원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비는 높직한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받침의 머리는 용의 머리화됐는데 여의주를 물고 있지 있으며, 목이 매우 짧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등은 선명하게 새긴 육각무늬로 덮혀있고, 중앙에 네모난 비좌(碑座)를 마련해 비를 꽂아두도록 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새겼고, 윗면에는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두 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 숙종 33년(1707)에 비를 세웠고, 채팽윤이 글을 짓고, 이진휴가 글씨를 썼다. 조선 중기의 작품이긴 하나 조각이나 표현기법 등이 아름답다/다음호에 계속(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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