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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13] 충열공 이방실 장군을 제향하고 있는 ‘남강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05 23: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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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경남 함안(咸安)의 남강서원(南岡書院)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때에 구국(救國)의 명장(名將)으로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정이품(正二品)라는 벼슬을 지낸 충열공(忠烈公) 이방실(李芳實) 장군(將軍)을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남강서원(南岡書院)은 본시(本是) 1842年: 헌종8年(憲宗)에 창건(創建)된 남강사(南岡祠)였다. 1865年: 고종2년(高宗)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해 남강사(南崗祠)가 훼철(毁撤)돼 빈터로 내려오다가 광복(光復) 4년(年) 후(後)인 1948年: 무자(戊子) 사당(祠堂) 자리에 남강서당(南岡書堂)을 지었다.





1995年: 을해(乙亥) 6月10日 서당(書堂)을 헐고 충열사(忠烈祠)와 남강서원(南岡書院)을 건립(建立)해 충열공(忠烈公)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계속 국비(國費)와 지방비(地方費)를 지원(支援) 받아 서원중건사업(書院重建事業)에 크게 투자(投資)해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문(內門), 외문(外門)을 짓고 담장도 두르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청(請)을 해왔다.


이방실(李芳實) 장군(將軍)은 함안이씨(咸安李氏)이다.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파산군(巴山君)에 봉(封)해 지신 시조(始祖) 이상(李尙)의 손자(孫子)이고, 판도사판서(判圖司判書) 이원(李源)의 아들로 1298年: 충열왕(忠烈王) 24)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내곡동 두능(杜陵)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1339年: 충숙왕(忠肅王) 8)에 어린 태자(太子) 흔(昕: 충목왕(忠穆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호위시종(護衛侍從)한 공(功)이 있어 충목왕(忠穆王)이 즉위(卽位)하자 중랑장(中郞將): 정오품(正五品)이 되고, 1353年: 공민왕(恭愍王) 2)에 대호군(大護軍: 종삼품(從三品)이 돼, 1354年: 공민왕(恭愍王) 3) 다루가치(달노화적(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 부자(父子)가 반란을 일어키자 이를 진압했다. 



1360年: 공민왕(恭愍王) 9) 1月16日 4만(萬)의 홍건적(紅巾賊)이 서북면(西北面: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에 침입해 오자 상장군(上將軍: 정삼품(正三品)으로 풍천(豊川: 황해도(黃海道) 송화군(松禾郡)에서 대파(大破) 평정(平定)한 공(功)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의 칭호(稱號)를 받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삼품(正三品)가 돼 개선(凱旋)해 전승개선연(戰勝凱旋宴)에서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옥띠(옥대(玉帶) 옥영(玉纓)(갓끈)을 하사(下賜)받았다. 


이때 왕비(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어찌 보물을 아끼지 않습니까?" 라고 하자 공민왕(恭愍王)이 "우리 종묘사직(宗廟社稷)이 폐허가 되지 않게 ‘우리 인민들을’ 죽지 않게 한 것은 모두 이방실(李芳實) 장군(將軍)의 공(功)인데 살을 베어 준다 해도 갚을 수 없소" 라고 말했다.




1362年: 공민왕(恭愍王) 11) 1月1日 20만(萬)의 홍건적(紅巾賊)이 다시 침입해 왕도(王都)인 개경(開京: 개성(開城)이 함락되고 나라가 위태(危殆)로울 때 도지휘사(都指揮使)로서 대파(大破)하고 개경(開京)을 수복(收復)해나라를 구(救)한 공(功)으로 같은 해 1月28日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정이품(正二品)가 됐다. 같은 해 2月29日 간신(奸臣) 김용(金鏞)이 공(公)을 시기(猜忌)해 거짓 왕명(王命)에 의해 장군(將軍)과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를 죽이니 이른바 ‘고려삼원수(高麗三元帥)’이었다.


장군(將軍)의 아들 중문(中文)이 겨우 10살 조금 넘어 저자 거리에서 노니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을 갖다 주면서 "지금 우리가 편안히 자고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이방실(李芳實) 장군(將軍)의 공로"라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1391年: 공양왕(恭讓王) 3) 3月17日 전의시승(典醫寺丞) 중랑장(中郞將) 방사량(房士良)의 상소(上疏)로 신원복관(伸寃復官)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종일품(從一品)로 추증(追增)되고 충열(忠烈)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392年: 조선태조(朝鮮太祖) 1)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마전(麻田: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미산면(嵋山面) 아미리(峨嵋里)에 숭의전(崇義殿)을 짓게 하고 1399年: 정종(定宗) 1)에 고려태조(高麗太祖)와 7왕(王: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 성종(成宗), 목종(穆宗), 현종(顯宗)을 제사(祭祀)지냈ek. 


1452年: 문종(文宗) 2)에 16명공신(名功臣: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유검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치려(金就礪), 조충(趙冲),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을 배향(配享)go 매년(每年)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하고 있다.


다만 그 중 남강사(南岡祠)에서의 제사(祭祀)는 후손(後孫)에게만 국한(局限)돼 사림(士林)이 지내는 제사(祭祀)에는 포함(包含)되지 않았다. 



그때 고을의 유림(儒林)들이 생각하기를 "장군(將軍)의 공덕(功德)이 후세(後世) 사람에게 미치고 있으니 제사(祭祀)를 지낼 의미에 부합(符合)된다. 이미 국가(國家)에서 제사(祭祀)를 올리고 있는 상황인데 이번 중건사업(重建事業)을 어찌 본손(本孫)에게만 맡겨두기만 하겠는가"하고 본손(本孫)과 함께 당국(當局)에 청(請)해 이런 거액(巨額)의 협조(協助)를 받게 했다. 


이에 따라 사우(祠宇)도 남강사(南岡祠)에서 남강서원(南岡書院)으로 등급(等級)을 올림으로써 영원한 덕(德)을 경모(敬慕)토록 했고,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문(內門: 숭의문(崇義門), 외문(外門: 성경문(誠敬門)을 지어 서원(書院)으로 서 모습이 갖추어지게 됐다. 


아! 장군(將軍)은 위대한 공훈(功勳)을 세우고도 간사(奸詐)한 무리들에게 모해(謀害)되어 비록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김용(金鏞)이 마침내 개경(開京)에서 효수(梟首)됐다. 이는 통쾌한 일로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언젠가는 바른 데로 돌아갈 날이 있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복재(復齋) 이가순(李家淳) 선생(先生)은 장군(將軍)을 악무목(岳武穆)에 비유(比喩)했다. 이것은 영원(永遠)히 공명정대(公明正大)한 평가(評價)가 되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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