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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0] 아담하고 아늑한 강화 ‘정수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07 01:44:04
  • 수정 2024-04-02 03: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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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강화도 남단에 해발 467m의 높이로 우뚝 솟고, 동서로 약 20리에 걸쳐 나래를 펴고 있는 마니산의 동쪽 기슭에 천년 고찰 정수사(淨水寺)가 고즈넉히 안겨 있다.

 

절 초입에서 1.3㎞정도 걸어 들어가면 울창한 숲속에서 아담한 옛절 정수사가 문득 나선다. 

 

눈에 띄는 건 아담한 대웅보전뿐리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주변 산세와 조화가 어후러져 고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절은 본래 만조가 되면 섬으로 변하던 곳이었으나 동서로 제방을 쌓아 육지가 됐다.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서해바다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懷正)대사가 창건했다. 마니산을 참배한 회정대사는 동쪽의 지형이 가히 불제자가 삼매정수(三昧精修)에 들 수 있는 곳이라 여겨 절을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이름했다. 

 

이를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중창했다. 법당 서쪽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정수사(淨水寺)라 고쳐 부르고 있다. 헌종 14년(1848)부터는 한때 법진.만홍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살면서 중수.중창을 거듭했고, 탱화를 봉안하는 등 절을 가꿨다.

 


경내에는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가 있고, 최근에 건립한 탑 1기가 법당 앞에 안치돼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보전 안의 본존불 왼쪽에 모셔진 지장보살상과, 1848년 무렵에 조성된 아미타불 후불.지장.칠성 탱화가 있고, 삼성각에 1878년에 조성한 칠성.독성.산신탱화가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안평대군이 썼다는 법화경.은중경이 있었으나 지금은 알 수 없고, 요사채 뒤 장독대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100m쯤 산으로 올라가면 함허 스님의 부도가 있다.

 

# 대웅보전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정수법당'이었으나, 언제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보물 제161호로 지정돼 있는 정수사 대웅보전은 세종 5년(1423)에 중창했다. 본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전면에 별도로 측면 1칸에 해당하는 툇마루가 있다는 사실이 매우 특이하다. 해서 전체적으로는 측면 4칸집이 된다. 그 한 칸은 후대에 증축된 것으로 짐작된다. 안동 개목사 원통전은 당초부터 툇간이 설치돼 있는 데 반해, 정수사 법당은 건물이 지어진 다음에 툇간이 마련됐다. 

 


본래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었으나 후대에 정면에 툇간을 설치해 측면 4칸이 됐다. 건물은 강렬하면서도 육중한 맛을 주는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지붕의 용마루가 측면 4칸 집의 중앙에 걸리지 않고 3칸 집 가운데에 걸려 있어 앞쪽 낙수면이 뒤쪽보다 크고, 측면 박공 부분이 길이와 높이가 서로 달라 이채롭다. 몸체와 툇간 부분의 공포가 눈에 띄게 달라 시대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몸체는 조선 초기 주심포계의 전형으로 간결한 모습이지만, 툇간의 공포는 조선 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뚜렷하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연꽃이 매우 화려한데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이다.

 


건물의 정면 가운데의 사분합문은 화병 속에 가득 담긴 모란과 연꽃으로 장식돼 있다. 측면엔 비바람막이인 풍판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청양 장곡사 상대웅전도 이런 양식을 썼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면의 문 가운데 사분합문은 마치 요술단지 꽃병에서 소담스런 목단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듯 화려하고 아름답다. 잘 조각된 목단 줄기들이 창살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꽃병은 청자와 진사 도자기이고, 네 개의 꽃병 문양이 다 다르다. 

 

# 대웅보전 옆 샘물

 


정수사는 천년고찰이다. 이 절은 보문사를 창건한 회정선사가 639년(선덕여왕 8)에 마리산 참성단에 들러 참배하고 내려오던 중 가히 삼매경에 빠져 수도에 정진할 수 있는 곳이라 여겨 절을 창건했다 전한다. 당시 절 이름도 지금과 같이 ‘정수사’였지만 한자가 다르다. 삼매정수(三昧精修)에서 이름를 취해 ‘精修寺’라 했다. 이후 정수사는 잊혀졌다가 고려 말 조선 초, 함허대사가 머물면서 역사에 다시 떠올랐다. 1426년(세종 8)에 함허대사가 대웅보전 서쪽에서 맑은 약수가 나온다고 해서 ‘淨水寺’로 이름을 바꿨다. 함허대사가 입적한 후 정수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주로 머물며 수도했다. 

 

# 대웅보전 꽃창살

 

정수사의 백미는 꽃창살이다. 네 개의 색깔이 각기 다른 꽃병에서 모란줄기가 위로 뻗고 가지가지에 모란꽃이 활짝 피었다. 꽃은 부처의 진리를 상징한다. 대웅전의 꽃창살은 그 양옆의 격자형 창호문과 좋은 대비를 이뤄 절제의 미를 확인하게 해준다. 법당 내부에는 이건창 가족이 시주해 그려진 후불탱화(1878년, 고종 15)를 병풍 삼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이 계신다. 

 


대웅보전 좌측 위에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에는 독성(나반존자), 산신, 용왕을 모시고 동쪽 벽에 칠성을 모셨다. 보통 바닷가 쪽 사찰에는 용왕을 모시기도 한다. 삼성각 왼쪽 언덕에는 근래에 지은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에는 석가모니불과 지장보살, 관음보살이 좌정하고 있다. 대웅보전 오른쪽에는 오백나한을 모신 건물이 있다. 오백나한전 북쪽 가운데 석가모니불이 좌정하고 바로 옆에 아기부처가, 또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계신다. 그 둘레와 앞에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는 중이고, 오른쪽 벽에는 함허대사의 초상도 있다.

 


강화도의 사찰에서는 좀처럼 탑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정수사에는 탑이 있다. 최근에 갈항사지 3층석탑을 모델로 조정한 것으로 보여 고풍스러운 맛은 없다. 또 절 안내 사무소 바로 옆에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신종에서 특징적인 부분만 취해 만든 것 같은 정수사 범종이 있다. 


# 함허대사 승탑 

 

오백나한전 뒤편 100미터 지점에 함허대사의 승탑(부도)이 있다. 함허대사 승탑은 단조롭다. 스승 무학대사의 승탑은 정성드린 흔적이 역력하고 승탑 앞에 쌍사자가 화사석을 받쳐든 석등도 있다. 그러나 함허대사의 석등은 네모난 받침대에 둥근 몸체, 둔탁한 지붕돌로 구성돼 있다. 

 


함허대사는 1376년(우왕 2) 지금의 충주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영민해 성균관에서 유교 공부에 열중했고 유교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21세에 성리학에 한계를 느끼고 관악산 의상암에서 출가했다. 다음 해 양주 회암사에서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 여러 절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깨우쳤다. 법명은 기화, 법호는 득통, 당호는 함허로 출가 전 성씨는 유(劉)씨였다.

 

이후 공덕산 대승사, 자모산 연봉사 등지에서 ‘반야경’ ‘금강경오가해’ 등을 풀어 밝혔고, 천마산 관음굴에서 선풍을 진작하는 등 교종과 선종에 이해가 밝았다. 1424년(세종 6)경 강화도 길상산에서 수행하다가 정수사에 들어 정수사를 크게 중창했다. 

 

그는 세종 시대에 실력 있는 고승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조선이 숭유배불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해 그는 유.불 회통론(會通論)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유교와 불교가 결국은 하나로 통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1433년(세종 15) 희양산 봉암사에서 입적했다. 함허대사의 승탑은 희양산 봉암사, 가평 현등사, 황해도 현봉사, 인봉사, 그리고 이곳 정수사에 각각 조성했다. 절 앞의 계곡을 대사의 이름을 따서 함허동천이라 부른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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