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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2] 화마의 상처 딛고 푸르름 되찾은 양양 ‘낙산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08 22:20:17
  • 수정 2024-04-02 03: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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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일원/사진-문화재청 [박광준 기자] 오봉산은 낙산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로,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로,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이다. 낙산은 범어 보타락가(補陀落伽, Potalaka)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했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키 위해서 찾아갔다.


굴 입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좌구(座具)를 새벽물 위에 띄우자 용중(龍衆: 용의 무리)과 천중(天衆: 하늘나라의 사람들) 등 8부신장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했다. 공중을 향해 예배드려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다시 바쳤다.


의상은 이들을 가지고 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해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이르기를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했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金堂:법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키 위해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가 절에 이르기 전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됐지만 알아보지 못했고,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이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승려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됐다는 설화가 있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승려가 사랑이 맺어지기를 관음상 앞에서 염원했는데, 해로하기 50여 년 만에 결국 고통을 안고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광수(李光洙)는 이것을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했다.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낙산 위에 3칸의 건물을 지어 불상을 봉안했다.


이 절은 고려 초기에 산불로 소실됐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했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세운 직후 봄.가을로 낙산사에 사자를 보내어 재를 올렸을 뿐 아니라, 이것을 갑령(甲令)으로 삼았다.


그리고 속인들은 이 낙산의 굴 앞에서 예배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고 믿었다. 1185년(명종 15) 당시의 병마사였던 유자량(庾資諒)이 굴 앞에서 예배하자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유자량이 청조의 영험을 보고 지은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다.


몽고의 침략으로 이 절이 전소될 때 두 성상(聖像)을 모신 건물도 불타 버렸고, 여의주와 수정염주는 이 절의 노비가 땅에 묻고 도망쳤다가 난이 평정된 뒤 파내어 명주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감창사 이녹수(李祿綏)는 1258년(고종 45)에 각유(覺猷)에게 어부(御府)에 모시도록 했다. 그러나 관음상은 이때 화를 당해 형체만 남았고, 복장(腹藏: 불상의 복부 부분에 넣어 놓는 성스러운 물건) 속의 보물은 몽고병에게 약탈당했다.


이규보(李奎報) 등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관음상을 봉안할 때 심원경(心圓鏡) 2개, 오향(五香).오약(五藥).색실.비단주머니 등을 관음상의 복중에 넣고 겉모습도 복구했다. 1468년(세조 14) 세조는 학열(學悅)을 중창주로 삼아 이 절을 중창하게 했다.


1471년(성종 2) 선학(仙學)이 용선전(龍船殿).영산전(靈山殿).어제루(御製樓).승당(僧堂) 등을 보수하고 단청했다. 4년 뒤 불탔으나 선학이 복구했고, 임진왜란 때 관음전과 관음상.정취전.금불상이 모두 소실됐다. 1631년(인조 9) 종밀(宗密)이 중창했고, 1643년 도원(道源)이 중건했고, 1905년 경은(敬隱)이 선당(禪堂)과 후각(後閣) 등을 복구했다.


그러나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3년 4월, 당시 1군단장이었던 이형근(李亨根)이 원통보전.범종각(梵鍾閣) 등을 복구했고, 1976년 원철(圓徹)이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보전.종각.일주문.천왕문.선실.승당.객실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99호인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양양 낙산사 홍예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낙산사 원장(洛山寺垣墻), 보물 제1723호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낙산사 홍련암(洛山寺紅蓮庵) 등이 있다.


낙산사 담장/사진-문화재청 

이 중 칠층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었던 것을 1468년의 중창 때 7층으로 개축했다고 전한다. 홍예문은 반월형의 문루(門樓)로, 낙산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반월형의 문을 만들었다. 이 26이라는 숫자는 당시 강원지부(江原之部)의 고을 숫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군수가 석재를 하나씩 모아서 세웠다는 속전이 있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적토(赤土)로 빚은 기와와 화강석을 배열한 것으로 전체 높이 4m, 둘레는 30여m에 이르고 있다. 근년에는 화강암으로 다듬은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을 조각했다. 석재는 전라북도 익산의 호남 채석장에서 반입한 것으로 750톤이 소요됐다. 조각가 권정환에 의해 1972년 5월 착수돼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됐다.


높이 16m, 둘레 3.3m, 좌대 넓이 6㎡이고, 좌대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이 조각돼 있고, 그 위 한 송이 연꽃으로 된 연봉(蓮峰) 위에 관음보살상을 안치했다.


관음상은 왼손에 감로수병을 받쳐들고, 오른손은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고, 미간에는 백호(白毫)를 박아 온누리에 퍼지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크기와 원만한 상호(相好), 균형 잡힌 체감미 등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낙산사 홍련암(옛 모습)/사진-문화재청 이 밖에도 이 절 옆에는 의상이 홍련 위에 나타난 관음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불전을 지었다고 전하는 자리에 세운 홍련암이 있고, 의상이 좌선했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도량 전체가 사적 제495호 양양 낙산사 일원으로 지정돼 있다.


2005년 강풍을 타고 번진 산불로 낙산사는 큰 화재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은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했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했다. 2015년 현재 화재로 손실된 사찰의 모습은 복원되었고, 주변 숲은 회복 중에 있다.


# 낙산사 창건설화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相)이 창건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이었다. 그 후 어느 해에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았다. 그는 지심으로 기도해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낙산사의 창건 연기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 책은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조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해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했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했다. 대나무는 다시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하는 낙산사의 창건연기 설화이지만, 이보다도 약 50년 전에 기록된 설화도 있다.


의상대/사진-문화재청 곧 13세기 전반에 활동한 석익장(釋益莊)의 ‘낙산사기(洛山寺記’가 그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돼 있는 이 설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양주(襄州) 동쪽 강선역(降仙驛)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몇 리쯤의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백 척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만 섬을 실은 배라도 드나들 만하다. 그 밑에는 항상 바닷물이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멍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굴 앞의 50보쯤 되는 바다 가운데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에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성용(聖龍)을 뵙고자 하여 돌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 14일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볼 수가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바다 속의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 대성(大聖)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다. 거기에 불전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라고 했다.


용도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쳤다. 법사가 여의주를 받고 그 말과 같이 가서보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 준 옥으로 상을 조성해서 봉안하니 바로 이 절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파랑새가 나타난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낙산사 창건설화와 석익장의 ‘낙산사기’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불에탄 낙산사 동종‘삼국유사’에서는 좌구를 물 위에 띄웠다고 했다. 그런데 굴 앞의 50보 쯤에 바위 하나가 있고, 의상이 그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는 ‘낙산사기’의 내용과 관련지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삼국유사’에서는 정성으로 기도하기 7일 만에 천룡팔부의 안내를 받으면서 굴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고 했는데, ‘낙산사기’에서는 14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관음 진신을 친견할 수 없어서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 때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다시 7일을 재계해 진용을 친견했다고 했는데, ‘낙산사기’에는 관음대성이 굴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산사기’에 의하면 동해용이 여의주와 함께 옥을 주었고, 이 옥으로 불상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금당에 소상(塑像)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처럼 두 기록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관음진신이 일러준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내용만은 일치한다.


따라서 서역의 보타낙가산에 관음진산이 항상 머문다는 설에 따라 동해의 낙산사에도 관음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이 정착되는 것은 의상법사에 의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다음호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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