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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3] 웅대하고 우아한 가람 ‘화엄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0 09:09:31
  • 수정 2024-04-02 03: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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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전경/사진-문화재청 

[박광준 기자] 천은사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대찰 화엄사는 노고단으로 오르는 지름길이 나 있는 초입이라 언제나 만원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이 중창했다, 장륙전(현재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의상이 만들었다 등등 여러 가지 창건설이 있었으나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뤘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7년 만인 인조 8년(1630)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에 의해 중수돼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숙종 28년(1702) 장륙전이 중건되자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 이후 부분적인 중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화엄사 가람은 4개의 공간으로 영역화돼 있다.


첫번째는 일주문.금강문.천왕문.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직선형 진입 공간이다. 건물들이 조금씩 비껴서 있다. 일직선 가람형태에서 느낄 수 없는, 절집으로 점점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일주문은 화엄사 전체 규모로 볼 때 소박한 편이고 금강문과의 사이에 화엄사 중창주 벽암스님의 부도비가 서 있다. 


보제루는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집으로, 천왕문 쪽에서 보면 2층 누각이나, 건물을 돌아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집이다. 보제루 앞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보제루를 돌아서면, 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대웅전과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영역이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서 있다. 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동오층석탑 쪽에서 각황전을 마주한 채 올려다보고 있는 적묵당 또한 맞배지붕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집이지만, 하지만 천은사의 보제루처럼 조용히 앉아 경내를 둘러볼 수 있도록 철책을 두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으로, 보물로 지정될 만큼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 건물임에도 거대한 규모에 안정된 비례를 갖춘 뛰어난 각황전으로 인해 조금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화엄사를 화엄의 근본 도량답게 만드는 각황전은 그 뜻만이 아니라 규모로 볼 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고졸하면서 당당한 위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건물을 받들고 있는 석축은 신라시대에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바른층쌓기를 한 장대석 위에 장방형의 돌들을 역시 바른층쌓기로 하고 두꺼운 판석을 덮은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안정감이 있다.



각황전 앞에 서 있는 석등의 위풍 역시 각황전의 웅장함과 짝을 이룬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원통전 앞 사자탑도 흥미로운 석조물이나, 쓰임새를 알 수가 없다. 노주(露柱)라고도 하고 감로탑이라고도 한다. 


원통전 창방 아래 토벽에 그려진 주악비천.산신.동자.나한상 같은 벽화는 채색과 묘사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원통전의 건물과 같은 시기인 조선 중기 때 그린 것이다.


화엄사를 위풍당당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영역은 각황전 뒤쪽, 경내 서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효대이다. 여기에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우수한 작품으로 쌍벽을 이루는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사사자삼층석탑 주변의 동백숲과 반송은 화엄사 경치 중에서도 손꼽힌다. 



반송과 동백나무 외에 화엄사에서 주목받는 또 다른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올벚나무이다. 수령 3백 년쯤 되는 높이 15m의 나무로, 80년 전까지만 해도 두 그루가 있었다.  그 중 한그루는 중수할 때 베어서 목재로 썼다고 한다. 그때 베어낸 나무로 만든 판자 한 장으로 적묵당의 안마루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니 대단히 큰 나무였음을 짐작케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창과 칼의 자루 등 무기의 재료로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한 바 있다. 당시 화엄사의 벽암스님도 절 근처에 많은 벚나무를 심었다고 전하고 있어, 이 올벚나무도 그 무렵에 심은 것 가운데 살아남은 한 그루일 것으로 짐작된다. 


올벚나무화엄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각황전 앞 석등을 의식한 듯 곳곳에 새로 조성한 석등이 눈에 띈다.


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구층암에는 10세기 무렵의 삼층석탑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석탑이 있고, 고려 초기의 석등과 배례석도 남아 있다. 매표소 입구와 매표소와 일주문 사이의 중간 산자락 언덕에 부도밭이 있다.


# 대웅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4년 벽암 각성대사가 다시 지은 것으로 화엄사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각황전을 제쳐두고 대웅전 하나만 놓고 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으로 크기도 작지 않고, 외관도 출중하다.


기둥 사이 간격이 모두 같고, 기둥이 높아 기둥의 배열이 매우 정연하다. 정면 기둥 사이에는 각각 세 짝씩의 문을 달고 그 위에 교창(交窓)을 냈다. 공포는 내외 삼출목으로 안팎 장식이 매우 뛰어나다.


대웅전 천장/사진-문화재청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주위의 외둘레칸은 중앙 부분보다 한 층 낮게 만들었다. 중앙의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세 분의 금동불을 丁자형의 처마를 이룬 정교한 닫집 안에 모셨는데, 전체가 매우 장엄하다. 법당에 봉안된 후불탱화(1757년)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신 비로자나 삼신불화이다.


# 각황전


대웅전에서 시작된 석축이 직각으로 꺾여 이어진 곳에,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각황전이 서 있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안정된 비례에 엄격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위엄과 기품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빼어난 건축이다. 본디 이름이 장륙전(丈六殿)이었던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인 숙종 25년(1699) 공사를 시작해 4년 만에 완공됐고, 공사의 마무리와 함께 숙종으로부터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격 또한 더욱 높아져 선교 양종 대가람이 되었다.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다.


각황전을 받치는 석축은 화엄사를 처음 지을 때인 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7칸 측면 5칸짜리 중층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바깥에서 보기에는 중층의 건물이지만 내부는 툭 터진 통층(通層)으로 됐다. 내부에 있는 15개의 높은 기둥이 기본틀을 이루고 여기에 1층의 바깥기둥과 2층의 변주(邊柱)가 부가된 구조이다.



정면은 가운데 세 칸이 가장 넓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좁게 했고, 측면은 다섯 칸으로 다른 건물에 비해 깊이가 깊은 편이고, 주존불을 가운데 칸에 모심으로써 앞뒤 두 칸을 회랑처럼 이용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나 그 주변을 경사지게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수법으로, 2층 벽은 창호로 처리해 내부에 조명을 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복잡한 공포구조가 처마 밑을 꽉 채우고 있어 매우 화려하다.



현재 각황전이 유명한 것은 그 건물의 아름다움과 규모 때문이지만, 예전에 각황전, 곧 장륙전이 유명했던 것은 이 전각 벽면을 돌에다 새긴 화엄경으로 장식했던 때문이었다.


“의상대사가 화엄십찰을 세우면서 화엄사에 3층으로 된 장륙전을 건립하고 사방 벽을 화엄경을 새긴 돌판으로 둘렀다”는 기록이 ‘봉성지’(鳳城誌)에 있으나, 발견된 석경 조각들로 볼 때 시대적으로 의상대사가 모두 새겼다고 볼 수는 없다. 화엄석경은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 당시 그 파편이 수만 점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재는 약 1,500여 점 정도가 남아 있다. 그 파편들은 각황전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 밑에 보관돼 왔으나, 얼마 전에 전체를 탁본하고 대웅전 옆의 영전으로 옮겼다.


# 원통전 앞 사자탑


상층기단의 네 귀퉁이에 사자가 탑신부를 받치고 있어 사자탑이라 부르고 있다. 외형을 살펴보면,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구성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하층기단 중석을 얹었고, 그 위에 갑석을 마련하고 복련 좌대에 올라앉은 네 마리의 사자를 귀퉁이에 장식해 상층기단을 삼았다. 사사자삼층석탑의 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머리에는 복련 좌대와 대칭되는 앙련을 이고, 상면에 복련을 장식한 갑석을 놓았고, 그 위에 탑신부를 모시고 있다. 두 마리는 입을 벌리고, 또 두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높직한 탑신의 각 면에 네모난 궤를 두른 다음 신장상을 한 구씩 얕게 조각했다. 탑신 위에도 한 매의 갑석을 놓았다. 아래쪽에 앙련이 새겨졌고 그 위에도 반구형의 돌출 석재가 있다.


전체적인 수법은 사사자삼층석탑의 선례를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조각의 세련됨이 선례에 미치지 못해 조성년대를 사사자삼층석탑보다 훨씬 뒤인 9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가 3m에 이르고, 보물이다.


# 동오층석탑


서오층석탑이 이중기단에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데 비해 동오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수수하다. 여러 장의 석재로 지대석을 짜고, 그 위에 4매로 된 하대석과 함께 우주와 탱주가 모각된 판석으로 중석을 세우고, 부연이 있는 4매석으로 덮어 갑석을 만들었고, 한 단의 굄을 두고 탑신부를 받는 것으로 단층기단을 완성했다.


신라의 탑으로는 보기 드문 오층석탑으로, 기단은 단층으로 구성돼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매로 돼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우주가 모각됐을 뿐이고, 2층 이상의 몸돌은 1층 몸돌에 비해 급격히 체감됐다.


지붕돌은 평평하고 낙수면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고 네 귀의 반전도 거의 없다. 추녀 밑은 수평이며 지붕돌받침은 각 층 4단으로, 2층 이상의 지붕돌은 몸돌을 따라 체감률이 심하다. 


상륜부에는 2층단이 있는 노반과 반구형의 복발, 보주형의 석재가 차례로 놓여 있다.


5층의 높은 석탑이면서도 기단을 단층으로 하고, 각 부재도 세부적으로 간략하게 처리해 무척 섬약해 보인다. 서오층석탑과 마찬가지로 9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는 6.4m이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 서오층석탑



화엄사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의 조각수법이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처럼 단순함과 화려함의 조화라는 미적 감동을 위해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나 짐작되지만, 일금당 쌍탑 가람의 형식조차 의심되는 시점에서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다.


동오층석탑과는 달리 화려하게 장식됐다. 특히 하층기단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보기 드문 예이다. 서오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얹어 석탑의 기본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과 하층기단, 1층 몸돌에 불교의 외호적 성격을 지닌 십이지상.팔부중상.사천왕상을 차례로 조각해 장식적인 측면을 더하고 있다. 특히 십이지상을 석탑에 배치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 서오층석탑의 팔부중상


상층기단 각 면에는 2구씩의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다. 하층기단은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한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같은 돌로 만들어 붙이고 각 면에 3구씩 십이지신상을 배치했다. 이를 4매 판석으로 덮고 상층기단을 받게 했다. 상층기단 중석은 4매로 짜였고 각 면은 우주와 함께 탱주로 구분됐고, 각 면에 2구씩 팔부신중 입상을 조각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이고, 몸돌에는 층마다 우주를 모각했고, 1층 몸돌 각 면에는 사천왕입상을 각각 하나씩 배치했다. 지붕돌의 낙수면의 경사가 적당하고, 네 귀의 반전도 경쾌하며, 지붕돌받침은 모두 5단씩이다.


상륜부는 2층단이 있는 노반과 함께 그 위에 보주가 남아 있다. 고준하면서도 상하의 체감률이라든지 유연한 지붕돌이 잘 조화돼어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을 갖춘 서오층석탑은 높이 6.4m이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석탑 남면 중앙에는 측면에 안상과 함께 윗면에 연꽃 3개가 예쁘게 조각된 배례석이 있다.


1995년 8월 1층 몸돌에서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흰색 종이 뭉치 1점과 두 귀가 달린 청자병 등이 발견됐다. 이 종이 뭉치는 폭 6㎝, 길이 27㎝로, 손으로 쓴 사경일 가능성이 높고, 화엄종찰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뤄 화엄경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종이류가 발견된 것은 석가탑에서 발견된 목판인쇄본 무구정광다라니경(국보)과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 백지묵서인 대방광불화엄경(국보) 두 종류뿐이었다.


# 각황전 앞 석등



높이 6.4m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도 가장 크다. 전체적으로는 신라 석등의 기본형인 팔각을 따르고 있으나, 간주석(竿柱石)을 장구 모양의 고복형으로 만들어 당시 전라지방에서 유행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팔각 하대석 각 면에는 짝을 이룬 안상이 조각됐고, 그 위에 귀꽃이 있는 8엽 복련이 크게 조각됐고, 운문과 팔각받침으로 간주석을 받고 있다. 간주석은 중앙에 2조 횡대를 돌리고 팔각의 면마다 횡대 위에 4엽 꽃무늬를 장식했다. 상대석은 8엽 앙련을 수평에 가깝게 조각하고 그 위에 한 층의 굄을 두어 화사석을 받게 했다. 팔각의 화사석에는 화창을 네 곳에 내었을 뿐 장식이 없다. 지붕돌은 얇은 편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고 추녀 위에는 귀꽃을 크게 세웠다.


상륜부는 사다리꼴의 노반과 팔각 앙화를 얹고 그 위에 보륜, 귀꽃이 달린 보개를 차례로 얹었고, 정상에 연화가 장식된 보주를 얹어 마무리했다. 국보로 지정돼 있고, 건립년대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 사사자삼층석탑



사사자삼층석탑이라고 불리는 이 탑은 기본적으로 이중기단을 갖춘 삼층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에 독립된 네 마리의 사자를 각 귀퉁이에 앉히고 그 대각선 중앙에 합장한 스님상을 세웠다. 이러한 독특한 형태 때문에 사사자삼층석탑이라 불린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인물상은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조사라고 하고, 사사자삼층석탑의 스님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한다. 효심이 깊었던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양하는 자신의 모습을 석등의 형태로 조각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효대라는 이름도 대각국사 의천이 이러한 전설을 인정하고 시를 읊었던 데에서 나왔다.


삼층석탑 앞에 있는 석등 역시 사사자삼층석탑 못지않게 특이하다. 길쭉한 네모의 배례석을 놓고 화사석을 받치는 간주석(기둥 세 개) 안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모습의 인물상을 배치했다.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라고도 한다.


# 사사자삼층석탑 앞의 석등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스님상이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다. 이 탑은 삼층석탑의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서 각 부재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 매우 아름답다. 높직한 하층기단 중석에는 한 면에 각각 세 구의 안상을 마련하고 그 안에 천인상을 양각하고 있다.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꽃을 공양하는 등 갖가지 모습으로써 불세계의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다.




상층기단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귀퉁이마다 사자를 배치해 석탑을 받게 했다. 네 마리의 사자는 표정과 자세 또한 각기 다르게 표현됐다.


아래윗부분에 별도로 앙련과 복련을 마련한 사자상과 달리 가운데 서 있는 스님상은 머리가 갑석에 붙지 않았다. 얼굴의 인상이나 몸에 걸친 가사, 균정한 체구 등이 돋보인다.


상층기단 갑석 위의 탑신부는 일반 석탑과 같은 형식이다. 1층 몸돌 네 면에 각각 문짝을 모각했고, 남향한 정면 좌우에 인왕상, 양 측면에 사천왕을 각 2구씩 그리고 북면에는 보살상 2구를 각기 부조했다. 지붕돌받침은 5단으로 만들었고, 지붕돌의 평박한 낙수면이나 경쾌하게 들린 네 귀 등은 영락없는 통일신라 전성기의 탑 모습과 닮았다.


상륜부는 노반석 위에 복발만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 양 옆에 파란 수국꽃이 한아름 피면 앞에 서 있는 석등의 공양상이 자아내는 표정과 함께 숭고한 불세계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장엄하다. 


석탑의 건립년대는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5.5m이고, 국보로 지정돼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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