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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4] 화마의 상처 딛고 푸르름 되찾은 양양 ‘낙산사(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0 15:33:25
  • 수정 2024-04-02 03: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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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 낙산사 홍예문



1466년(세조 12) 임금이 방문했을 때 세운 것으로 강원도 26개의 고을이 힘을 모아 26개의 화강석을 무지개 모양으로 조성했다. 좌우 양쪽에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 같은 벽을 쌓아 낙산사의 안팎을 구분지었다. 석문 위로는 1963년에 건립한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었다. 2005년 4월에 발생한 산불로 소실됐다가 2007년에 복원됐다.


# 낙산사 칠층석탑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襄陽 洛産寺 七層石塔)은 강원도 낙산사에 있는,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99호로 지정됐다.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했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됐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해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됐다.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襄陽 洛山寺 義湘臺와 紅蓮庵)은 강원도 양양군에 소재한 명승 중 한 곳이다. 낙산사의 의상대와 홍련암을 아우르는 명승지로, 대한민국의 명승 제27호로 지정돼 있다.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송강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671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낙산사’와 낙산사 창건 당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에 설치했다는 ‘의상대’, 의상대사가 홍련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해 설치한 ‘홍련암’ 등 낙산사의 곳곳에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의상대와 홍련암은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노송(老松)들이 자리하고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떠오르는 일출 경관으로 유명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낙산사 주요 경관 요소이던 낙락장송이 2005년 강원지역의 큰 산불로 소실돼 경관이 크게 훼손됐으나, 의상대 및 홍련암 주변 해안에는 시스택(sea stack)이 발달해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낙산사는 ‘관동십경’에 옛 모습이 잘 남아있고, ‘삼국유사’ ‘동문선’ ‘동문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 많은 시인묵객 등의 낙산사 창건 및 중수 기록과 유람기, 경관을 노래한 시문이 다수 전하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 양양낙산사건칠관음보살좌상


2003년 보물로 지정됐다. 낙산사는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낙산의 관음굴에서 기도해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유명한 관음도량이다. 이후 조선초 세조 때 학열(學悅)의 지휘 아래 크게 중창했고, 정희왕후가 세조를 위해 발원해 1469년(예종 1)에 제작된 범종도 현존하고 있어, 이 무렵 관음보살상도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랫동안 이곳의 대표적인 신앙의 대상이 바로 이 관음보살상으로, 원통보전에 봉안돼 있다.



높이 112㎝로, 겉면에 마른 옻칠을 한 불상이다.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금속으로 만든 팔각대좌 위에 앉아 있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무릎 위쪽에서 각기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짓고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과 부드러운 어깨선, 적절한 너비의 무릎 폭 등이 조화를 이뤄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안정감 있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얼굴은 사각형적인 형태이지만 부드럽고 둥근 턱선으로 부드러운 모습을 이루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엿보여 온화한 인상이다.


치밀한 장식이 새겨진 높은 보관과 목걸이, 팔찌 등 각종 영락장식이 어깨와 다리는 물론, 대좌 위로 늘어진 상현좌(裳懸座)의 옷자락 위로도 표현돼 장식성이 부각된 점, 단정하고 부드러운 자세, 섬세한 손가락 표현 등은 고려 말 이래의 전통을 이은 조선 초기의 보살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1333년 작 대세지보살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덕 장륙사 건칠관음보살좌상(1395년. 보물, 1989년 지정), 대구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1447년 중수, 보물, 1989년 지정),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1516년 개금, 보물, 1989년 지정)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과 유사하다.


조선 초기의 보살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건칠상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는 시대의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낙산사 사리탑


이것은 조선 숙종 18년(1692)에 건조한 것으로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부도탑이다.



구조는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짜고, 하대는 8각으로 측면에 안상을 마련하고 그 속에 태극문을 조각했고 그 상부에는 16판의 복련을 조각했다. 중대석은 선조문을 조각했고 상대석에는 앙련으로 받치고 그 위의 측면에는 안상이 있고, 안상내에는 범자를 음각했고, 탑신은 구형이다.


옥개석은 8각인데 상륜부는 앙련과 복발.보륜.보주를 한돌로 조각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탑자리는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 하고 숙종 9년(1683)에 홍련암에서 도금불사를 거행할 때 서기가 가득 차더니 공중에서 영롱한 구슬이 떨어졌는데 유리와 같이 광채를 냈다고 한다. 석겸 등이 이에 대원을 발해 이 탑을 쌓고 간직했다고 한다.


#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소재 낙산사에 전하는 조선시대 해수관음공중사리탑과 비, 그리고 사리장엄구 일괄 유물이다.


2011년 보물로 지정됐다. 2006년 5월 낙산사의 공중사리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불사리 1과를 담은 유리제 사리호, 금제합, 은제합, 청동합, 각각의 합을 싼 비단보자기, 발원문이 담긴 연기문(緣起文) 등 사리장엄구 일괄 유물이 발견됐다. 특히 불사리가 1692년에 봉안됐다는 기록은 탑비에 새겨진 내용과 일치해, 사리탑과 비, 사리장엄구 등의 자료적 가치를 높여줬다.


사진-문화재청 낙산사에 전하는 공중사리탑은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고려시대에 유행한 팔각원당형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전체 구조는 지대석,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뤄진 기단부, 탑신과 옥개석을 갖춘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 등 세부분으로 구성됐다. 사리장엄구는 탑신부의 상단에 있는 원형의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발견됐다.


사리구는 유리제 사리호, 금제합, 은제합, 청동합의 순서로 포개어져 있었고, 각각의 기물은 비단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싸여 있었다. 금제합 안에는 색동 비단 1겹으로 싼 자주색 유리제 원형 사리호가 놓였고, 그 내부에는 불사리 1과를 흰색 명주 솜 위에 봉안했다. 


사진-문화재청 또한 청동합 안에는 전체 4매로 이어진 발원문이 있었다. 한지에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고 비교적 보존상태도 양호했다. 발원문의 첫 머리에는 강희(康熙) 31년이라고 기록돼 있어, 숙종 18년(1692)에 봉안됐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국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萬壽無疆)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한 내용이 포함됐다.


발원문이 있는 사리장엄구의 발견으로 탑비의 존재도 새롭게 주목됐다. 즉 발원문과 탑비의 기록이 거의 일치해, 사리의 봉안 유래를 설명하는 자료로 탑비의 내용이 재검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중사리탑비의 지은이는 이현석(李玄錫, 1647∼1703)이고, 갑술년(甲戌年, 1694)에 제작됐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중앙 정계에서도 오랫동안 활약한 조선시대 후기 문신이다. 공중사리탑비의 내용은 낙산사가 위치한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찬탄, 낙산사의 위상과 관음신앙에 얽힌 영험, 공중에서 사리가 나타난 이적, 사리영험에 대한 견해, 공중사리탑 건립에 관한 기록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를 통해 불사리의 존재와 신앙, 사리장엄구와 공중사리탑이 만들어진 경위에 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사진-문화재청 해수관음공중사리탑과 사리장엄구, 탑비는 낙산사의 유서 깊은 사리신앙을 보여주는 일괄 유물이다. 이처럼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그와 관련된 직접 기록인 탑비가 함께 보존된 예는 많지 않다. 특히 사리장엄구에 봉안된 발원문과 탑비 기록의 연관성을 통해, 정확한 제작시기와 사리장엄의 조성 배경 및 과정, 의미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매납된 상태 그대로 수습된 사리구는 조선 후기 사리장엄 방식을 보여주면서, 사리구를 감싼 비단 보자기도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어 직물사 연구에 보탬이 된다. 공중사리탑과 그 안에 봉안된 사리장엄구, 탑비 등은 17세기 후반 조선시대 불교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 낙산사담장 (洛山寺垣墻)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최근에 연결.보수했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길이 220m이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위.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해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층의 길게 다듬은 돌기단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긴 받침돌을 놓았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했다.


돌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싸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 낙산사 동종


1469년(예종 1)작. 높이 158㎝, 입지름 98㎝. 1968년 12월 19일에 보물로 지정됐다가 2005년 4월 5일에 발생한 낙산사 경내 산불로 인해 용해돼 문화재에서 지정해제 됐다.


낙산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세조를 위해 그의 아들인 예종의 명으로 주성한 종이다. 용두(龍頭)는 웅건한 몸체, 사실적인 용린(龍鱗)과 어울려 생동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고, 몸체 중간에 굵은 융기횡대(隆起橫帶)를 쳐서 상하로 크게 구분하고 있다.



용통(甬筒).유곽(乳廓).유두(乳頭)는 모두 생략됐고, 상대(上帶)가 위치한 자리에는 범자(梵字) 12자가 양주(陽鑄)돼 있고, 종견(鐘肩)에 연화문(蓮花文)을 빽빽이 배열하고 있다. 유곽 자리에는 네 구의 보살입상이 배치되고 그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네 개씩의 범자가 양주돼 있는데, 이 양주된 보살입상은 원형두광(圓形頭光).보관(寶冠).천의(天衣) 등을 모두 유려한 선조(線彫)로 표현하고 있다.


종신의 끝부분에는 태조이선대(太彫二線帶)를 9.5㎝ 간격으로 둘러 하대(下帶)를 마련하고 있고, 하대의 내면에는 태조(太彫)의 권운문(卷雲文)과 세조(細彫)의 파상문(波狀文)이 조식(彫飾)돼 있다.


하대와 중대 사이에는 장식문양 대신 ‘成化五年乙丑(성화5년을축)’이라는 주성 연대를 밝히는 명문을 비롯해 많은 명문이 돋을 새김돼 있어, 주성 연대와 조각장(彫刻匠).주성장(鑄成匠) 등의 주종 관계자를 밝혀주고 있다.


이 종은 각 부 양식에서 우리 나라 고유의 종인 신라와 고려시대의 동종양식을 따르지 않고 조선 전기에 성립된 조선시대 특유의 범종양식을 보인다. 양주된 보살입상은 우수한 조선시대 조각의 하나로 꼽혔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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