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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5] 대한민국 3대 관음성지 ‘강화도 보문사’
  • 박광준
  • 등록 2022-10-10 18:40:06
  • 수정 2024-04-02 03: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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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가산보문사 일주문 [박광준 기자] 보문사(普門寺)는 신라 선덕여왕 4년( 635년)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강화도로 내려와 창건했다. 창건 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사라 했고,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해 보문사라 이름짓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산과 절의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하고 있어 보문사가 관음도량임은 창건의 역사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보문사를 창건한 지 14년 만인 649년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보살 등 스물 두 분의 석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려 석굴 법당에 모신 나한전 조성 일화는 유명하면서 기도의 영험을 많이보여 신통굴로 불리기도 한다. 나한전의 역사는 보문사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인천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자리하고 있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이다. 그 후 수백 년간의 내력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보문사권선문’에 의해 조선 순조 12년(1812)에 중창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더 분명한 기록은 고종 4년(1867) '경산대사가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각을 건조했다. 동왕 30년(1893) 4월에는 왕후 민씨의 전교로써 요사와 객실을 중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와불전와불1928년에는 절 뒤 암벽에 관음보살을 조성했고, 근래에 대범종을 주조.봉안했다. 현재 전해지는 당우는 대법당과 관음전.종각.석실 등이 있다. 석모도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의 마애 관세음보살님은 탁 트인 서해를 바라보면서 중생들을 살펴주고 있다. 


보문사는 나한전에서 24시간 스님들의 기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누구나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나한도량으로 불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보문사 석실

 

보문사에 있는 석굴사원으로, 나한상(羅漢像)을 모시는 나한전의 구실을 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해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문을 만들고, 그 안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해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제화갈라보살, 나한상 등을 모셨다. 


이 보문사는 신라 635년(선덕여왕 4)에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 오는데, 조선 1812년(순조 12)에 중건했고, 그후 몇 차례 중수했다고 한다. 이곳 나한전(羅漢殿)에 모신 보문사는 경남 남해 보리암,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다. 이 석불들은 신라 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현몽(現夢)대로 안치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석굴사원이다. 



전설에 의하면 석굴에 모셔진 나한들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 한다. 홍예문 안으로 들어서면 자연암벽에 석실을 마련했는데, 석실은 가로 11.3m, 세로 8m, 높이 4m의 크기다. 석실 벽에는 반원형의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撑柱)를 설치했다. 탱주 사이에 21개의 감실을 만들어 그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좌우 보처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좌우 보처 옆으로 18분의 나한상을 안치했다. 


전설에 의하면 22분의 나한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고 하는데, 여기 석실에 모셔진 분은 21분이다. 한 분은 어찌 됐는지 알 수 없다. 조각이 썩 잘된 것은 아니지만, 나한상 특유의 천진함과 익살스러운 면모가 보여 친근감을 준다. 



어느 때 보문사에 도둑이 들어 촛대를 비롯한 유기그릇 일체를 가지고 밤새도록 도망을 갔는데, 새벽에 보니 도둑은 여전히 보문사 절마당을 뱅뱅 돌더란다. 이 석굴사원 나한들이 부린다는, 이와 같은 신통스런 일화들이 많아 사람들은 이 석굴을 신통굴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7호이다.


# 보문사 맷돌 



보문사 석실 앞에서 삼성각으로 오르는 계단 옆 화단에 있는 맷돌이다. 맷돌은 곡물을 가는데 쓰이는 용구로 위.아래 두 짝으로 구성돼 있다. 보문사 맷돌은 보문사 승려와 신도들이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서 지름 69cm, 두께 20cm로 일반용보다 두 배 정도 큰 화강암(花崗岩) 맷돌이다. 전체적으로 돌을 다듬은 솜씨가 부드럽고 조각도 정밀한 편이다. 둥근 모양을 한 하부의 주연(周緣)에는 홈이 널찍하게 파여져 있고, 맷돌질로 잘게 으스러진 분말 가루 등이 밑에 바치는 그릇에 흘러 잘 담아지도록 홈통도 적당한 너비로 파여 있다. 


웃돌은 얇게 조성됐고 역시 주연에 굵직한 테를 양각하고, 그 양쪽을 파 놓아 그 곳에 자루를 끼워 맷돌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정확한 제작년도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맷돌은 웃돌, 곧 상대석만 남아 있다. 보문사 맷돌은 웃돌 뿐만 아니라 하대석까지 완전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보문사 향나무



보문사 경내에 있는 향나무로 수령이 700여 년에 달한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고,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쓰이고 정원수.공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보문사의 향나무는 보문사 석실(石室) 앞 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이 향나무의 높이는 20m, 둘레는 3.2m 정도이다. 높이 1.7m에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동쪽 줄기의 둘레는 1.3m, 서쪽 줄기의 둘레는 1.5m이다. 


나무의 형태는 마치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는 듯이 보여 기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에는 죽은 것 같이 보였으나 3년 후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보문사 향나무는 보문사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와 앞마당에 있는 느티나무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고, 오래된 나무로서 식물학적 보존가치가 인정돼 기념물로 지정됐다. 


# 나한석굴마애석불좌상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관음도량인 이곳 낙가산 보문사의 이름을 풀어 보자. 경전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머무는 남해(南海)의 섬이 낙가(洛迦)이고, 광대무변한 서원을 실천하는 몸과 장(場)이 보문(普門)이다. 따라서 낙가산 보문사는 그대로 관음보살의 터전이고 상징이다. 선덕여왕 4년 4월이었다.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마치 인형처럼 생긴 돌덩이 22개가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건져 올린 돌덩이를 바다에 던져 버리기를 두 차례나 했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한 번 건져 올려 명산에 잘 모셔 달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어부는 다음날 22개의 돌을 꿈속에서처럼 건져올렸고, 지금의 석굴 부근에 옮겨놓았는데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해서 이곳에 단을 만들어 모시게 됐고, 이것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오늘날의 석굴이다.


그 후 수백 년간의 내력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보문사권선문'에 의해 조선 순조 12년(1812)에 중창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더 분명한 기록은 고종 4년(1867) "경산대사가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각을 건조했다. 동왕 30년(1893) 4월에는 왕후 민씨의 전교로써 요사와 객실을 중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1928년에는 절 뒤 암벽에 관음보살을 조성했고, 근래에 대범종을 주조.봉안했다. 현재 전해지는 당우는 대법당과 관음전.종각.석실 등이 있다.


# 마애석불좌상



석굴법당 왼쪽으로 10여 분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낙가산 중턱의 깎아지른 바위면에 마애석불좌상이 조성돼 있다. 불상 앞에는 석등 2기가 놓여 있다. 낙가산 중턱 깎아지른 바위면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장관이다. 미끄러질 듯 곡선으로 휜 넓은 바위면에 새겨진 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뒤로는 광배가 있다. 


앞으로 모은 두 손에 정병(淨甁)을 들고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하단부는 특히 휜 바위면을 따라 굽어 있어 자연스런 맛이 덜하다. 얼굴에 비해 높고 넓은 코, 투박한 귀, 좁은 이마, 지나치게 밭은 목 등 윤곽의 균형은 조화롭지 못한 편이다. 그러나 성상으로서의 상징은 어느 불상 못지않다. 각진 어깨에 가사를 입었다. 가슴에는 큼직한 卍자가 새겨져 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가 32척, 폭이 11척이다. 이는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 화신(化身)을 상징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1928년(혹은 1921년) 금강산 표훈사 주지 이화응 스님과, 당시 보문사 주지였던 배선주 스님이 함께 조성한 불상이다. 불상 왼쪽에는 명문이 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5호이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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