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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6] 고려전기에 창건한 북한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1 18:53:16
  • 수정 2024-04-02 03: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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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촬영한 보현사의 모습이다/국립중앙박물관[박광준 기자] 보현사는 북한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고려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40호. 31본산제도(本山制度)가 실시되던 일제강점기에는 21개 군의 절을 관장했던 본산 중 하나이다.


수행처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춘 지리적 여건뿐 아니라 조선시대 구국(救國)의 선봉장이었던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입적처(入寂處)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절은 968년(광종 19) 창건됐고, 창건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이름난 고승으로부터 화엄교관(華嚴敎觀)을 전해받고 1028년(현종 19) 연주산에 들어가 살았던 탐밀(探密)과 그의 제자 굉확(宏廓)이 모여드는 학승(學僧)들을 수용할 절을 짓기 위해, 기존의 보현사 동남쪽 100여 보 되는 장소에 243칸의 정사(精舍)를 이룩하면서 보현사는 묘향산을 대표하는 절이 됐다.


묘향산 보현사 만세루/대웅전과 함께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비탈진 지세를 이용해 앞은 2층으로, 뒤는 1층으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누각이다. 만세루 앞의 9층석탑은 북한의 국보 제7호로 지정돼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영산전 내부/내부에는 ‘ㄴ’자형 불단을 만들어 석가모니불과 성중(聖衆)들을 봉안했다. 천장은 중도리를 경계로 빗천장과 우물천장을 조합해 만들었다. 건물 내외부에 금단청과 모로단청을 혼합하여 매우 화려하게 장식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절을 크게 일으킨 탐밀과 굉확이 죽은 뒤에도 제자들이 절을 계속 증축, 1067년(문종 21) 문종은 땅과 밭을 하사했다. 1160년(의종 14) 10월 12일 왕은 이 절에 행차해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30근의 은병(銀甁) 10개를 만들게 했다. 각각에 다섯 가지 향(香)과 다섯 가지 약을 담아서 불전(佛前)에 바쳤다.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보현사는 그 뒤 다섯 번의 중창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1096년(숙종 1)에는 달보(達寶)가 재창했고,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이 3창했고, 1449년(세종 31)에는 해정(海正)이 4창했다. 1634년(인조 12) 화재로 건물들이 불타자 명조(明照)와 각성(覺性)이 중창했고, 1761년(영조 37) 9월에 다시 실화(失火)해 절이 모두 불타버리자 4년 동안에 걸쳐 남파(南坡).향악(香岳) 등이 여섯번째로 중창했다.


묘향산 보현사 상원암/상원암은 보현사의 암자로 북한의 국보 제41호로 지정돼 있다. 상원암은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불유각, 용후각 등으로 이뤄져 있다.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동쪽에 1칸, 서쪽에 3칸을 덧붙였다. 구조 형식은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상원암의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작품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묘향산 보현사 상원암 내 칠성각/칠성각은 상원암의 옆에 세워진 사방 단칸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임에도 처마 밑을 빈틈없이 공포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구조형식은 5량 구성의 다포계 팔작집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조선불교통사'의 기록 외에도 1216년(고종 3) 9월에 여진족이 묘향사에 들어와서 이 절을 불태워버림에 따라 중창을 하게 됐는데, 이는 1218년 거란의 적병을 토벌했던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잘 나타나고 있다. 당시 보현사는 한창 중수중이었는데 그 규모는 300여 칸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또 1818년(순조 18) 이 절에 머물고 있던 한월(漢月)에 의해 개금불사(改金佛事)가 이루어뤄졌다. 당시 이곳에 있던 석가여래상과 양대보살상(兩大菩薩像).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의 채색이 모두 퇴색돼, 미타존상(彌陀尊像)과 대웅전의 석가여래상.양대보살상을 개금(改金)하고 십육나한상에는 개채(改彩)했다.


영변에 위치한 보현사 건물 중 조계문의 정측면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촬영/국립중앙박물관

영변에 위치한 보현사 건물 중 만세루의 정측면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촬영/국립중앙박물관

1912년 12월 23일 보현사는 ‘선교양종대본산묘향산보현사(禪敎兩宗大本山妙香山普賢寺)’라는 공식 절 이름 아래 30본산 중의 하나로 등장했다. 1912년 당시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冥府殿).심검당(尋劒堂).수월당(水月堂).명월당(明月堂).진상전(眞常殿).동림헌(東林軒).만수각(萬壽閣).관음전.대장전(大藏殿).영산전(靈山殿).극락전.사리각(舍利閣).수충사(酬忠祠).팔도십육종도규정문(八道十六宗都糾正門, 酬忠祠門).팔만대장경보존고 등이 있었다.이 가운데 수충사는 임진왜란 때의 호국승장 휴정(休靜)의 공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이다. 


영변에 위치한 보현사 건물 중 수월당의 정면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촬영/국립중앙박물관

영변에 위치한 보현사 건물 중 수충사의 정측면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촬영/국립중앙박물관유물로는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7호로 지정된 묘향산 보현사 구층탑과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 144호로 지정된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탑이 있다. 또 유적 중 석가여래사리부도비(釋迦如來舍利浮屠碑)에는 사리봉안의 내력이 기록돼 있다. 신라시대 자장(慈藏)에 의해 통도사(通度寺)에 봉안됐던 석가여래사리가 1592년 왜병의 침입으로 인해 해를 입게 되자 사명당(四溟堂)이 금강산으로 사리를 봉안해왔다. 이에 휴정은 금강산이 바다 가까이에 있어 적국과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그 중 1함(函)은 묘향산에 봉안하고 1함은 통도사로 되돌려 보냈다. 그 까닭은 적이 노리는 것이 사리보다는 금은보화에 있고 또 자장의 뜻이 본래 통도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불사리(佛舍利)는 통도사와 보현사에 분안(分安)됐다. 이 비문은 서산대사가 지은 뒤 손수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변에 위치한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현사 서산대사탑이다. 일제강점기 촬영/국립중앙박물관이 밖에도 임진왜란 때 전국 사찰에 격문(檄文)을 보내 의승(義僧)의 궐기를 독려했던 초대 승군대장 휴정의 사리부도와, 묘향산을 중심으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보현사에서 입적한 원준(圓俊)의 석종(石鐘), 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언기(彦機)의 석종과 비문,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영암대사석종비(靈巖大師石鐘碑).월저대사비(月渚大師碑) 등이 있다.


보현사의 말사는 일제강점기에 총 112개가 있었다. 이 중 산내말사(山內末寺)는 안심사(安心寺).내원암(內院庵).보윤암(普潤庵).화장암(華藏庵).법왕대(法王臺).상원암(上院庵).축성전(祝聖殿).불영대(佛影臺).내보현암(內普賢庵).불지암(佛智庵).보발암(寶鉢庵).금강굴(金剛窟).삼성대(三聖臺).설령대(雪靈臺).하비로암(下毘盧庵).보월사(寶月寺).남정암(南靜庵).계조암(繼祖庵).일출암(日出庵).백운암(白雲庵).신흥암(新興庵).은봉암(隱峯庵) 등 24개 사암(寺庵)이 있었다. 보현사의 산외말사(山外末寺)의 수반지(首班地)는 양화사(陽和寺, 泰川郡)이고, 양화사의 산내말사는 상운암(上雲庵).화장암(華藏庵).원적암(圓寂庵).내원암(內院庵).축성전(祝聖殿) 등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보현사(普賢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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