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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9] 기도와 나눔으로 함께하는 ‘화계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4 21:09:36
  • 수정 2024-04-02 03: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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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화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화계사는 도심과 가깝고 주택가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숲과 계곡이 감싸 안아 자연에서 주는 편안함과,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강북구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화계사는 숭산행원 대종사의 원력과 법맥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전 세계 120여개 선원과 한국 불교를 배우기를 원하는 외국 수행자들이 화계사 국제선원에 모여 함께 수행정진 하고 있는 참선수행과 국제포교의 중심사찰이기도 하다.


이 절은 1522년(중종 17)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했다. 원래는 고려 광종 때 법인대사 탄문(法印大師 坦文)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인 삼각산 부허동(浮虛洞)에 보덕암(普德庵)을 창건했는데, 1522년 신월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과 협의해 지금의 화계사 자리로 옮기고 법당 3처(處)와 스님들의 요사(寮舍) 50칸을 지어 화계사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1618년(광해군 10) 9월 화재로 모두 불타 버리자, 다음 해 도월(道月)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시주를 받아 중창해 다음 해 3월에 완공했다. 그 뒤 1866년(고종 3)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시주를 받아 퇴락한 건물들을 보수했고, 1876년 초암(草庵)이 관음전을 중창했다.


1878년 초암이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했고, 1880년에는 조대비(趙大妃)가 명부전의 불량답(佛糧畓)을 시주했다. 이 무렵 화계사에는 대비와 상궁들의 왕래가 잦아 사람들이 ‘궁(宮)절’이라고 불렀다.


1885년 2월 금산(錦山)이 산신각(山神閣)을, 1921년 현하(玄荷)와 동화(東化)가 관음전과 시왕전을, 1943년 다시 시왕전을 중수했다.


1964년 오백나한전을 건립하고, 1972년 종각을 지었다. 1973년 대웅전 삼존불을 새로 봉안했고, 1974년 관음전이 소실됐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대적광전.명부전(冥府殿).삼성각(三聖閣).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범종각.보화루(寶華樓).조실당.백상원(白象院) 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이들 불상의 조성 연대는 미상이나 대웅전이라는 현판은 신관호(申觀浩)가 쓴 글씨이다.


현재의 대웅전은 1870년(고종 7) 용선과 초암이 화주(化主)가 돼 중건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서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대웅전은 내부천장의 장식이나 건축부재의 장식이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목조건축물이다.


대적광전은 1991년 정수가 조성한 4층 건물로서 정면 7칸, 측면 4칸의 현대식 불전이다.



명부전에는 죽은 뒤 명부세계의 교주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좌우보처 그리고 염라계(閻羅界)의 십대왕과 사자들이 봉안돼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78년 초암이 중건한 것이다. 이 명부전에 봉안돼 있는 불상과 시왕상은 고려 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조각한 것이라고 하면서, 원래는 황해도 배천 강서사(江西寺)에 모셨던 것을 1877년에 옮겨온 것이다. 명부전의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대웅전 오른편에 위치한 천불오백성전은 1964년에 준공한 것이다. 내부에는 오백의 성상(聖像)을 봉안하고 있다. 이 오백의 성상은 최기남(崔基南)이 1915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금강산에서 입산수도해 오직 18나한상과 천불상.사천왕상을 조각해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모셔 오던 것을 옮겨와 대웅전에 보관하다가, 최기남의 가족이 천불오백성전을 짓고 봉안하게 된 것이다.


2층 6각형의 건물인 범종각에는 불구사물(佛具四物: 불교의 예불의식에 사용하는 네 가지 법구)이 모여 있다. 이 가운데 2층 천장에 걸려있는 동종(보물, 2000년 지정)은 본래 경상북도 풍기 희방사(喜方寺)에 있던 종으로 1898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종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1683년에 사인 스님에 의해 제작됐고 무게는 300근에 달한다고 한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고,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갖게 됐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함께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또한, 범종각에는 만지기만 해도 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질 정도로 심하게 풍화된 목어(木魚)가 걸려 있는데, 이 목어는 원래 고려 때의 창건사찰인 보덕암에 있던 것으로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이 밖에 경내에는 1978년 8월에 세운 고봉(古峰: 1890∼1961)의 추모탑과 오탁천(烏啄泉)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오탁천은 까마귀가 주둥이로 바위를 쪼아 약수가 나왔다고 해 붙여진 이름인데, 속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고, 흥선대원군도 이 약수로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 화계사의 중심사상


숭산 행원 대선사


사진출처/화계사 홈페이지화계사는 오늘날 선사상(禪思想)의 중심 사찰로서 특히 경허.만공.고봉 대선사의 법맥을 이은 숭산 행원(崇山行願1927~2004) 선사가 주석하면서 국내외 많은 수행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스님은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 세계 2차 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했다. 스님은 힘든 100일간의 기도 수행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당대 최고의 선사였던 고봉 선사에게서 인가를 받았다.


숭산스님은 서양에서 가르침을 시작한 첫 번째 한국 스님으로, 19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잠시 로드아일랜드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인근의 브라운대학 학생 중에서 참선수행에 관심 있는 이들이 스님의 작은 아파트를 찾게 되면서 첫 해외 포교가 시작됐다. 이후 프로비던스선원이 만들어져 현재 전 세계에 퍼져있는 선원들의 중심이 됐다.


관음선종(觀音禪宗)의 창설자인 숭산스님은 화계사에서 2004년 11월 30일에 세수 77세 법납 56세로 평화롭게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원적에 드셨지만 전세계 32개국 120개 이상의 선원에서 스님의 가르침을 이어나가고 있다.


인생


인생은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가는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는 것은 일어나는 한 조각 구름 같고,

죽는 것은 흩어지는 한 조각 구름 같다.

떠 있는 구름은 본 래 없는 것,

그러나 늘 맑은 대로 머무르는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은 홀로 항상 청정하여 생사에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 시는 고려 말 나옹 선사(1320~1376)의 누나가 나옹 스님으로부터 염불을 배우고 난 후 읊은 시로서,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이 수정한 것이다. 참다운 인생의 길을 묻고 있다.


송원 설정 대종사


사진출처/화계사 홈페이지현 화계사 조실 스님은 송원 설정(松原雪靖) 대종사이다. 스님은 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주역의 대가였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열네 살인 1954년 부친의 생신 불공을 위해 수덕사에 들렀다가 그대로 출가했다. 1955년 제3대 방장 원담 진성(圓潭眞性1926~2008)스님을 은사로, 혜원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햇고, 61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부산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를 맡고 있던 1980년 10.27법난 때 대전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와 협박에도 사흘 동안 단식 좌선으로 버텼다. 이후 전두환 정권이 10만 병력을 동원해서 불교를 탄압하자, 신군부가 주도한 관제법회에서 ‘이게 과연 국민화합인가’라면서 준엄한 사자후로 꾸짖었다.


1994년 종단개혁 당시 개혁회의 법제분과위원장을 맡아 개혁 입법을 진두 지휘했다. 스님은 특히 종단 정상화와 교육을 통한 승가의 질적 향상, 포교 활성화, 재정 투명화라는 입법 기조에 따라 총무원장 권한을 분산하고 제한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글씨 - 화계사 조실 송원설정 대종사1994년부터 1998년까지 제11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맡아 종단발전을 위해 헌신하면서 안으로는 문중과 계파를 떠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데 힘썼고, 이를 통해 종도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종단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설정스님은 평소 행정 소임을 보면서도 참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아 이사(理事)를 겸비한 대표적인 스님으로 꼽힌다. 안거 때마다 봉암사 태고선원을 비롯해 상원사 청량선원과 덕숭총림 내 정혜사 능인선원 등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들이는 등 철저한 수행으로 운수납자의 지남이 되고 있다.


2009년 설정스님은 덕숭총림 수덕사 제3대 방장 원담 진성(圓潭眞性 1926~2008)스님 입적 후 제4대 방장으로 추대돼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게 잘하면 된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면서 젊은 후학들과 함께 하루 여덟 시간 정진하면서 선농일치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또한 신심(信心).원력(願力).공심(公心)을 재가신자와 출가수행자 모두에게 권장하면서 복덕과 지혜를 쌓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2017년에 대한불교조계종 제35대 총무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화계사 조실로 있으면서 숭산스님의 세계일화(世界一花)와 덕숭총림의 선농일치(禪農一致) 사상을 이어나가고 있다./다음호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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