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14]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핀 145인의 한국사랑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9 21:56:40
  • 수정 2024-04-10 10:11:33

기사수정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


[박광준 기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 145명이 다른 이들과 함께 안장돼 있다. 선교사들은 당시 세상의 변방이던 'Corea'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 헌신했다. 


또 이들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해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했고, 이들 중 일부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를 살펴보면 이들을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맺은 열매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묻힌 선교사 한 분 한분의 삶은 선교 200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소중한 밑거름이다.  이곳을 한국 교회의 성지로 가꾸고 지키는 일은 이 당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귀한 소명이다. 


# 양화진의 역사적배경



양화진은 버들꽃나루, 한강을 중심 무대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양화진의 깊은 강물에는 대규모 선박들이 하역할 수 있어서 제물포로 들어오는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양화진을 통해 도성과 궁궐로 배분됐다. 반면 이러한 천혜의 입지조건으로 인해 양화진은 한성을 넘보는 외적들이 쉽게 들이닥칠 수 있는 국방의 취약지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화진의 전략적 중대성은 더욱 부각돼 영조 30년에(1754) 군사적 주둔지로서 군진(軍陣)의 설치가 완료됐다. 이로 인해 한 때 그 명칭이 양화진이 되기도 했다.


구한말 조선과 서구 세력의 물리적 충돌은 주로 수상(水上)에서 일어났는데 양화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응징키 위해 프랑스 군함 세 척이 1666년 3월에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같은 해 10월 강화도에서 패퇴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척화 의지는 더욱 강화됐고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극심해졌다. 대원군은 양이(洋夷)에게 더럽혀진 한강을 사교(邪敎)들의 피로 씻는다고 하면서 양화진 앞 강물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물들였다.


양화진은 갑신정변(1884)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金玉均) 이 1894년 조선 왕실에 의해 능지처참돼 효시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양화진은 낯선 서구의 물결과 조선의 묵은 정신세계가 순순히 합류하지 못하고 충돌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곳이었다.


# 외국인 묘지로서 양화진의 시작



대원군의 섭정을 종식시키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구축한 민비와 외척들은 왜국의 빗장을 벗기고 서구열강들과 국교를 수립했다. 이러한 지각변동을 틈타 주로 영어권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의 복음화를 목표로 제물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신정변 (1884) 당시 민영익(國 )을 구사일생으로 살려낸 서양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덕분에 선교사들과 왕실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맺어지고, 이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금 교령(敎令)으로 인해 복음전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들은 주로 서구의 의료와 교육, 자선 사업을 통해 봉건적인 조선사회에 침투키로 했다. 당시 조선의 반기독교적인 정서의 영향으로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개인전도보다는 사회 제도 전반에 걸친 간접적인 선교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사가 추후 민족의 역사와 얽히는 근거가 됐다. 



한편 알렌에 이어서 광혜원(廣惠院)의 원장이 된 헤론(Heron, John W.)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 40 세로, 삶을 마감했다. 당시 헤론의 시신을 어디에 매장할 지가 화급한 문제로 제기됐다. 왜냐하면 삼복더위 중에 시신을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 묘지로 사용되던 제물포까지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족과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 어거스틴 허드 2세(Augustine Heard II) 를 통해 한성 가까운 곳을 매장지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마침 조선은 통상지역 안에 외국인의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수호통상조약을 영국과 체결하고 있었는데, 미국 공사 허드는 최혜국 조관를 근거로 헤론의 매장지를 한성 가까운 곳에 요구했다. 이에 조선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 과의 급박한 서신 왕래 끝에 양화진이 매장지로 정해졌다. 


#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서의 양화진



양화진에 묻힌 분들 가운데는 일제 암흑기 한민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했던 선교사들이 있다. 이들은 전도 양양한 젊은이로서 모국에서 누릴 수 있었던 수많은 권리들을 포기하고, 당시 세상에서 가장 덜 알려졌던 나라 'COREA'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서 헌신했다. 이들은 병원과 학교의 설립과 같은 사회제도에서 뿐만 아니라, 신분제와 남존여비 관습의 철폐와 같은 무형의 정신 세계에서도 한국민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일부는 일제의 무단강점을 한국민과 같이 아파했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어떠한 열매들을 맺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에서는 이러한 양화진의 참된 정신을 계승하고 보존키 위해서 100주년 기념교회를 설립했다. 서울시와 마포구청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조성하고 지금은 양화진의 국가 사적지 지정을 위해서 힘쓰고 있다. 외국인 선교사 묘지와 천주교의 양화나루.잠두봉 사적지를 연결해서 양화진 일대를 세계에서 보기 드문 신.구교 만남의 성지로 조성하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으로 이 땅에서 썩어지고 양화진에 묻혀있는 선교사들의 삶은, 선교 200 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소중한 자산이자 밑거름이다. 또한 이곳은 한민족의 지난했던 근대사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기도 하다. 


# 소다 가이치(1867-1962, 일본, 사회사업가)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안장돼 있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부인과 함께 한국 고아들을 위해 삶을 바쳤다. 그는 1921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천 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고, 일제 패망 후에는 일본에서 복음을 전했다. 1961년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영락보육원에서 고아들과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아펜젤러, H.G.(1858-1902,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는 한국 근대교육과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1885년 내한해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교육기관인 배제학당과 첫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세웠다. 한글 성경 번역에도 헌신한 그는 성경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선박사고로 순직했다. 양화진에는 그의 기념비가 있고, 아들 내외와 딸이 안식하고 있다. 


# 언더우드, H.G(1859-1916, 미국, 북장로회)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85년 내한해 우리나라 첫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와 경신학교, 연세대학을 설립했고, 평생을 성경번역위원장으로 일했다. 그의 헌신은 한국 교회역사와 사회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양화진에는 자신과 아내를 비롯해 모두 7명의 가족이 안식하고 있다. 


# 헐버트, H.B.(1863-1949, 미국, 북감리회)



헐버트 선교사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한국인'으로 칭송받는 분이다. 그는 또 선에 관한 글을 써서 외국에 알렸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지만 여독으로 세상을 더났다. '웨스트민스트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뜻대로 양화진에 안장됐다. 


# 홀, R.S.( 1865-1951, 미국, 북감리회)


로제트 홀은 의료 선교사로 남편과 딸을 잃는 고통 속에서도 45년 동안 한국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겼다. 아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요양원을 세워 결핵 환자들을 치료했고,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해 결핵에 대한 계몽운동을 벌였다. 양화진에는 3대에 걸쳐 6명(선교사 4명)의 홀 가족이 합장돼 있다. 


# 베텔. E.T.(1872-1909, 영국, 언론인)



베델은 구한 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억눌린 한국인들의 대변인 역할을 한 분이다. 그는 민족 지사들을 신문사의 주간으로 영입해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1909년 5월 1일, 37세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안장됐다./다음호에 계속, 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