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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변화상을 겪었던 ‘경희궁(慶熙宮)’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13 15:51:56
  • 수정 2022-11-13 16: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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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조선후기 왕의 피우(避寓)를 위한 이궁으로 건립된 궁궐로, 본래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해 서궐이라 불리고 중요시됐다. 


이 궁이 창건된 것은 1617년(광해군 9)으로,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기 위해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했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했다.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즉위했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했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했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했고,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1760년(영조 36)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다.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건 때 정전.동궁.침전.제별당.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다. 그 창건 공역은 1617년에 시작돼 4년 뒤인 1620년에 끝마쳤다. 이 공사를 위해 전국에서 공장(工匠)과 자재가 동원됐다. 



그 뒤 1693년(숙종 19) 수리가 있었고, 1829년(순조 29) 큰불이 나 회상전.융복전.흥정당(興政堂).정시각.집경당.사현각 등 궁내 주요 전각의 절반 가량이 타 버렸다. 이듬해 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해 소실된 건물을 재건했다.


1860년(철종 11) 전각의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1902년(광무 6) 일부 전각의 수리가 있었다. 이렇게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이미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돼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내의 건물은 철거돼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이전되기도 했고, 궁역(宮域)도 주변에 각종 관사 등이 들어서면서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돼 궁터가 더욱 줄어들었다.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를 서초구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했다가,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키로 해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했고,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건물의 배치가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어, 정궁(正宮)인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즉, 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됐는데 그것과 다르고, 또한 궁의 정문이 바른쪽 모퉁이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런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어졌던 창덕궁에서도 보이는 현상으로,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린 결과로 보인다. 


각 건물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외전에 있어서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은 궁의 서쪽에 동향했고, 주위는 행각으로 둘러싸고 사방에 문을 뒀다. 숭정전 뒤에는 후전인 자정전(資政殿)이 있고, 주변에 수어소(守御所)인 태령전(泰寧殿)이 있다. 





숭정전의 오른편, 즉 북쪽으로는 왕이 신료(臣僚)들을 접견하고 강연(講筵)을 여는 곳인 흥정당이 있고, 주변에 왕이 독서하는 곳으로 존현각(尊賢閣).석음각(惜陰閣)이 있다. 이상 외전을 구성하는 중심 전각들의 우편에 내전이 있는데, 그 정침이 회상전이다. 그 서쪽에 융복전, 동서에 별실이 있고 주변에 연못과 죽정(竹亭)이 있다. 


융복전의 동편에는 대비를 모시는 장락전(長樂殿)이 있고, 주변에 용비(龍飛).봉상(鳳翔)이라는 누각과 연못이 있고, 동편에 연회장소인 광명전(光明殿)이 있다. 궁의 외부 출입문은 모두 다섯이다. 정문은 동북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興化門)이다. 결국, 경희궁은 정문이 동북 모서리에 있어서, 정문을 들어서서 내전 앞을 지나 서쪽 끝의 외전 정전 일곽에 도달하게 되는 특수한 배치와 구성을 보여 준다. 




경희궁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 자리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는 다른 곳에 이건돼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우선, 현존하는 건물을 보면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인 흥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 등이 있다. 숭정전은 1926년 조계사(曹溪寺)에 매각돼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주심포양식의 건물이다. 1618년에 창건된 이래 건물 자체가 재해를 입은 일은 없었으므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포는 외부 이출목이고, 내부는 양봉(梁奉)형식으로 보를 받치고 있고, 주칸에 화반이 있어 장여를 받쳤다. 흥화문은 역시 1618년에 세워진 건물로 창건 때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돼 왔으나, 1932년에 이전돼 일본인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경희궁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정문이 모두 2층으로 구성돼 있는 데 비해 이 건물만은 단층으로 됐다. 그 이유는 궁의 창건 때 이 궁이 피우처로 마련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학정은 1890년(고종 27) 회상전의 북쪽에 지었던 정자로, 1923년 민간인에 매각됐다가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공원 뒤편에 옮겨져 있다. 본래 무인들의 궁술 연습장으로 세운 건물인데 갑오경장 이래 궁술이 폐지되는 바람에 민간에서 유기화(遊技化)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궁내에 세웠던 건물이다. 


이 밖에 경희궁의 중요한 건물로는 회상전.융복전.집경당.흥정당 등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자취를 잃었는데,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을 통해 그 규모만을 살펴보면, 대내(大內)의 정전인 회상전은 정면 7칸의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창경궁의 통명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를 두지 않은 건물이었다. 



융복전은 정면 6칸으로, 왼쪽에 건물이 연접돼 ㄱ자형 평면을 이뤘다. 그리고 집경당.흥정당은 각각 정면 5칸, 정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두 건물 모두 일종의 누각과 같이 건물 일부에 누하주(樓下柱)가 있고 높은 계단을 갖췄다. 현재 궁터에는 용비천(龍飛泉)이라는 샘터가 남아 있고, 숭정전 등 주요 전각의 기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은 한동안 학교로 이용돼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주변의 조경이 변모되고 지하 방공시설이 구축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옛 건물의 기단이 일부 남아 있고 전체적으로 궁궐의 지형이 잘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아직도 궁궐의 자취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다. 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췄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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