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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6] 독립군 단체 통합주도, 임정 초대 국무령 역임한 '이상룡'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17 06: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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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상룡 李相龍 ,1858.11.24 ~1932.05.12 . 경상북도 안동 , 독립장 1962


"안동에서 태어나 정통 유학자로 학문적 수업을 닦은 선생은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적 유림 인사들과 함께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계몽활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선생은 50이 넘은 나이에 망명을 결심, 이회영, 이시영과 함께 간도에서 독립군 기지 개척에 힘썼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을 통해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기여한 선생은 이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으며 여러 분파로 갈린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서 끝까지 헌신하였다."


# 안동 유림에서 해외 독립군 조직까지


이상룡(李相龍, 1858. 11. 24(음) ~ 1932. 5. 12) 선생은 1858년 경북 안동에서 이승목(李承穆)과 부인 권씨 사이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영남학계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金興洛)에게 사사하면서 명가의 후예이자 정통 유학자로서 손색없는 학문적 수업을 닦았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에 서서히 침략의 촉수를 뻗쳐오고 있었으나 그런 속에서도 임청각의 서재에 묻혀 벗삼아 생활하던 선생의 청년기는 비교적 평온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표에 항거해 외숙인 권세연(權世淵)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진, 행동하는 척사유림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선생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눈뜸과 참여는 1905년 을사조약을 맞아 1만5천금을 투자, 가야산에 군사기지를 설립하고자 하는 계획으로 계속 됐으나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선생은 무기의 열세, 근대적 군사훈련의 부족 등으로 인한 의병의 한계를 자각하고 구국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법흥동 고성이씨종택선생은 인근지역의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 유림적 인사들이 협동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자 이에 합류해 칸트, 홉스, 루소 등 서구근대사상의 비판적 검토를 통한 1907년경 계몽주의자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선생은 50세였다. 


안동의 전통사회에서 명가의 후손으로 이미 뚜렷한 입지와 명망을 얻고 있던 선생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새롭게 자신의 의식세계를 전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이는 선생의 사상이 구국의 차원에서 하나로 묶여질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전통유교적 사고의 바탕에서 새롭게 밀려드는 서구의 신사조를 흡수함으로써 동양이냐 서양이냐의 극단적 양자택일을 떠나 이 둘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시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선생이 이렇듯 혁신된 유림의 행보를 걷게 됨에 따라, 그리고 안동지방 특유의 친족적 연대감으로 인해 선생은 이 지역 집단개화의 선두에 자리잡게 된다. 1908년경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해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들었다. 또한 대한협회 중앙본부가 점차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자 본부에 통렬한 비판을 가해 구국계몽운동이 갖는 본래적 모습을 지키고자 했다. 계몽운동은 어디까지나 구국의 방편으로 활용될 때 그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안동 임청각 군자정한편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신민회에서는 조국의 망국사태를 맞아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해 해외에 독립군 기지개척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진수와 황만영을 통해 이 계획을 전해들은 선생은 이에 찬동, 1911년 1월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일가를 거느린 채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을 결행했다. 이미 50이 넘은 고령에 자신의 삶이 어우러진 고향, 안동을 떠나 새로운 생활을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선생의 결단은 결코 범용한 것이 아니었다.


# 신흥무관학교 설립


선생은 가도가도 드넓은 벌판만이 이어지는 땅, 바람 찬 간도 땅에 이주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堡)였다. 선생은 이회영, 이시영 등과 함께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개척을 시작했다. 우선 동지들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이주기반을 마련했다(간도에서 벼농사는 한인들이 처음 시작했다). 


이들은 우리의 옛 땅,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선조들의 웅대한 기개가 어린 곳에서 1,000여년이 지나 다시금 조국광복의 꿈을 심어갔던 것이다. 경학사는 단순히 이주민의 자치단체만은 아니었다. 이주민이 경제적 안정과 법적 지위 보장 등에 힘쓰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군사교육을 통해 조국광복의 전위대(前衛隊)를 이루는 독립군 양성에 착수했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민단(1912)과 한족회(1919)로 변천하면서 한인사회의 토착화를 이뤄 갔고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면서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장병들을 길러냈다.


3.1독립운동의 함성이 전세계의 잠자는 양심을 두드리던 1919년(3.1독립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터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교훈이 됐다.) 한족회는 군사기구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했는데 선생은 군정서 독판을 맡아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서로군정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갔다.



# 독립군 단체 통합주도, 임정 초대 국무령 역임


그러나 선생의 활동에서 무엇보다도 뜻있고 그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끊임없이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한 점이다. 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조직된 군사통일촉성회에 참가해 박용만, 신숙 등과 군사기구 통합의 방안을 협의했고 1923년에는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대표 약 120명이 모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한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 등 4명을 대표로 파견해 각 독립운동 계열의 의견조정과 단합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기대와는 달리 임시정부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자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대표들을 소환해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또한 선생은 국외독립운동의 요람이라 할 중국 동삼성 지역의 군사 통합에도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1922년 6월 동삼성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시도해 각기 개성이 다른 독립군 조직을 묶어, 통군부(統軍部)를 조직했고 이를 다시 확대 개편해 대한독립군단 등 소위 8단 9회(17개 독립운동단체)의 거중 조정에 성공,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의 궁극적 전위대인 독립군의 군세 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선생은 당시 다양했던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일관되게 산업교육우선론과 독립전쟁론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운동은 결국 일제 무력과의 싸움이었고 이를 위해 선생은 독립군 조직, 즉 무장력을 갖춘 항일조직의 결집에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미 의병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해 두 가지 독립운동 방안의 장단점을 터득하고 있었다. 의병운동의 한계였던 근대적 군사력의 미비와 계몽운동의 한계인 힘의 부족을 통감한 선생은 이 양자의 통합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책무를 자임(自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립된 이후 자체정비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임시대통령에 박은식을 선임했다. 박은식 선생은 임시정부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꿨고 임시의정원에서는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중추였던 선생을 초대 국무령에 선출했다.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를 다시금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곧추세우고 분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과 연대감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다. 선생은 우선 일본군과의 접전 속에서 항일운동의 전위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 동삼성 지역의 김좌진, 김동삼, 오동진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해 임정이 다시금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기를 바랬으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뜻과 같이 이룩되지는 못했다. 상해와 간도는 각기 처한 독립운동의 상황이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이상룡의 묘선생은 임정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1928년 5월부터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삼부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국민부로의 부분적인 통합을 이룬 채 1932년 5월 12일 중국 서란소성자에서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했다. 50여년에 걸친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 계몽운동, 독립군 등 당시 가능한 모든 독립운동 방안을 섭렵한 것이었고 이는 선생의 폭넓은 인품을 반영한 것이었다.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만인 1990년 9월 유족과 국가보훈처 관계자들로 구성된 유해봉환반에 의해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고 현재는 국립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돼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충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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