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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19] 사육신을 모신 사당 '민절서원(愍節書院)'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21 18:52:02
  • 수정 2024-04-10 10: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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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터만 남아 있고, 그 터에 육신사(六臣祠)라는 사당과 오석으로 제작된 6각의 ‘사육신지묘비’가 세워져 있다.[박광준 기자] 1681년(숙종 7)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설립된 이후, 1691년(숙종 17) 12월 민절사(愍絶祠)라고 사액됐다가 1692년(숙종 18) 1월 서원으로 고쳤다. 조선 후기 사육신(死六臣)을 배향한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1681년(숙종 7) 9월 서울과 지방의 사림이 연대해서 사육신(死六臣)의 제향을 위해 사당으로 건립했다. 건립 당시 상량문은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찬술했다. 1691년(숙종 17) 9월 국왕이 김포 장릉(章陵)에 거둥하는 길에 노량진을 들러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묘와 영월 노산대군의 묘에 치제했다. 


이어서 사육신의 복권과 함께 같은 해 12월 민절사라고 사액했다가 1692년(숙종 18) 1월에 서원으로 고치고 3월에 복관 고유제를 거행했다. 이후 정조나 고종 등이 치제문을 내리는 등 국가적 관심 하에서 관리됐다.


서원이 건립되던 숙종대 전반기에는 사육신의 복권과 관련해 전기가 되던 시기이다. 서원 건립에 앞서 1679년(숙종 5) 9월 허적(許積)이나 권대운(權大運)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육신묘에 대한 봉식(封植)이 이뤄졌다. 1680년 12월에는 강화유수 이선(李選)이 복권 문제를 제기했고, 1681년 7월에는 노산군이 노산대군으로 호칭이 격상됐고 묘의 위판도 지위에 맞게 개수됐다. 


민절서원은 이 같은 상황에서 설립된 것으로, 성삼문.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을 배향했다. 1694년(숙종 20) 박태보(朴泰輔)와 오두인(吳斗寅)을 민절서원에 합향(合享)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시대가 같지 않고 일도 다르다는 이유로 허가되지 않았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고, 그 터에 육신사(六臣祠)라는 사당과 오석으로 제작된 6각의 ‘사육신지묘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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