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28] 조선 세종때 노한의 별서였던 '효사정'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03 19:28:40
  • 수정 2024-04-10 10:22:06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한강변은 수도 한양을 감돌아 흐르는 그지리적 조경과 천하제일의 형승지로 인해 수많은 누정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어떤 곳에 어떤 배치로 어떻게 지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있었던 간단한 역사적 기록이나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시문 등을 통해 그 형성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다. 


동작구의 누정으로는 효사정.용양봉저정.월파정 등이 있다. 그 중 효사정과 월파정은 이미 그 자취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근래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 효사정


동작구 노량진 한강변 남쪽 언덕에 있었던 조선 초기의 정자로,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1376-1443)의 별서이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금천현에 의하면, 효사정은 노량 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우의정 노한의 별장이다. 강희맹이 지은 기문에 “삼성산은 곧 금천 진산이다. 거기에서 한 가닥이 꿈틀거리면서 북으로 뻗다가 한수와 만나는 곳에 한 지역을 이루었는데, 곧 의정 노공숙공의 선영이 있다. 


공숙이 모년에 그곳에다가 그의 모친을 장사하고 시려하였는데, 효성이 극진하였다. 복을 마치고는 서러워하던 그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드디어 그 위에다가 정자 하나를 짓고, 때로 등람하여 오래도록 사모하는 정을 품고 자손에게 유언하여 자신도 그곳에 묻혔다. 공숙의 맏아들 돈녕공과 나의 선군 대민공과는 동서간이었다. 일찍이 정자에서 놀다가 돈녕공이 정자 이름과 기문을 지어주도록 청하였다. 대민공이 정자 이름을 효사라 하였으나, 기문은 짓지 못하였다. 그리고 30여년 뒤에 돈녕공과 대민공이 모두 별세하였다. 표종제 되는 공숙의 손자 좌찬성 선성 노자반이 나에게 청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선친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 선자(이 글을 지은이의 어버이)께서 정자 이름 짓던 당시를 보았다. 산수를 둘러보며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여 그 요점을 짐작함이 있는 듯하더니, 마침내 효사로써 명명하였으나 기문은 없다. 형이 잇달아서 지어달라’ 하였다. 



나는 글이 졸하다는 것으로 세 번이나 사절하였으나, 자반은 오직 선인의 뜻을 저버린다는 것으로 책망하였다. 의리상 사절하지 못하겠기에, 다시 자반에게 청하기를, ‘무릇 한수를 끼고 지은 정자가 그 몇인지를 모르거니와, 경치가 온전하고 또 요긴한 지역은 실상 이 정자를 첫째로 친다. 그런데 선자께서 명명하면서 형승은 제외하고, 반드시 효사를 범한다 하였다. 이것은 무왕이 길을 효사하면서 잊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러므로 그 효가 법될 만 하다는 것이다. 그런즉 효를 하면서 혹 앚었다거나 혹 법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모두 구차할 뿐이다. 대개 효란 것은 감싸두면 한 마음의 덕이 되고, 발하면 온갖 행실의 근원이 된다. 천자로부터 서인까지 효하는 바가 비록 크고 작고, 멀고 가까움이 같이 않음은 있으나, 그 효는 같다. 이러므로 황후가 효하지 못하면 천하와 국가를 보전할 수 없고, 경대부가 효하지 못하면 제 몸도 보존할 수 없다. 그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면, 생각하는 바가 없을 것인가. 사해만성이 선왕한테서 받은 것으로 잃지 아니하고, 문정과 가업을 선조한테서 받아 감히 떨어뜨리지 아니하고, 신체와 발부를 부모한테서 받아, 감히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을 생각한 것이 마땅하다. 정성된 마음으로 한 번 숨쉬는 동안이라도 혹 잊지 않는 것은 천자와 공경.사서까지 동일한 효도이다. 아, 세상에 자손을 위한 계책을 하는 자가 누구인들 때마다 아름다운 아들이 있어서 무궁토록 전하고자 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천운과 명수로써 될 수 없어서, 호화한 문벌과 세도하던 씨족도 한두 세대 전한 뒤에는 쇠망하여서 떨치지 못하는 자가 흔히 있다. 이때를 당하면 비록 선조가 물려준 전원과 제택이 있다 하더라도 다 권귀한 자의 차지로 되고 말 뿐이다. 그런즉, 자손으로서 효사하는 직분을 다했다고 할 것인가.

 


옛적 당나라 이위공이 평천 십리장을 점유하고자 손을 경계하기를 , ”진실로 평천장 꽃 하나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다.“ 하였다. 이공도 또한 당나라 명공이다. 어찌 꽃 하나 돌 하나 따위 자잘구레한 것을 위해서 이와같이 경계하였으리오. 공숙공은 공명이 세상을 뒤덮을 만하였다. 젊은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 구룡에 배회하면서, 능히 효성으로써 가법으로 하여, 자반까지 벌써 3대이다. 자반이 공명 덕업이 능히 조상의 뒤를 이어 세상사람의 심복하는 바 되고, 여러 아들도 또한 뛰어나게 두각을 드러내어 경사가 다하지 않으니, 이것은 그 효사하는 도리를 다했기 때문인가. 어찌 그 효자가 끊어지지 않는가. 후손 자손이 이 정자에 올라서 송추의 가지가 서로 닿고 상제가 그늘의 두터움을 보고 백세 토구를 남이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한 다음 그 유래한 것을 궁구하면, 우리 선자께서 명명한 것이 속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만약, 강정 한 굽이는 우리 사유라 허여 잃지 안 것이 아니라, 자반은 어떠하다 하는가. 채납될 만한 것이 있다면 기문으로 하기를 청한다. 창룡 계사 첫 겨울 하순에 기한다. 했다.



기순의 시에, ”음용은 멀어져, 아득하게 추상하기 어려워라. 한 생각 유유하여, 다할 기약이 없다. 벼슬길에 사는오랜 동안 풍목탄을 생각하였다. 독서하는 방에서는 일찍 육아편 읽기를 폐했다. 쓸쓸한 상로에 마음 상하게 하는 날, 황홀하게 갱장에서 얼굴 보는 때여라. 지금 나라에서 효도로 다스림을 숭상하는데, 명성을 드러나게 함도, 응당 구천(황처)에서 사렴하는 것을 위로하리라“


효사정에서 바라본 한강대교정인지의 시에, ”사정이 높이는 큰 강위에 임했는데, 효성스런 아들 착한 손자 갖추어 아름답다. 세덕은 이미 산같이 무겁고, 가성은 길이 물과 함께 흐른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데 개오동나무 늙었고, 가을날이 쌀쌀하니 골짜기가 그윽하다. 굽어보고 쳐다보는 정희를 누가 알아주리. 때때로 북궐을 보니 서기띤 연기가 뗐네“했다.


이 밖에 정창손, 김수온, 서거정, 이승소의 시를 확인할 수 있다.



신숙주에 시에, "산세가 큰 돌 머리에 꿈틀거리며, 영수한 기운을 잉태하여 어느 때나 아름답다. 세 봉우리는 하늘 밖에 솟아 화산이 푸르고, 한 줄기는 뜰 앞에 돌아 한수가 흐른다. 착함을 쌓아 선세부터 간단이 없었고, 효성은 대마다 전해 유명에 통했네. 잇달은 경서가 다하지 않으리. 아름다운 기운이 밤낮으로 떴구나" 하였다. 


현존하는 효사정은 일제 때 한강신사가 있던 자리에 1993년 새로 지었다.  



효사정 현판은 노한의 17대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현재 효사정은 1993년 신축한 것으로 효사정공원 안에 위치했고, 서울특별시 우수경관 조망명소 중 하나로 선정됐다.


효사정은 조선 초기부터 조성된 한강 유역의 정자들이 접대와 풍류 등을 위한 것에 비해 효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