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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33]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 등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09 10:27:38
  • 수정 2024-04-10 10: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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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작구 국가등록문화재

[박광준 기자] #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서울工業高等學校 本館]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서울工業高等學校 本館]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 학교 건물이다.


서울공업고등학교는 대한제국기 고종(高宗)에 의해 관립상공학교로 처음 개교한 학교로, 본관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동작구 내의 근대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공업교육에 대한 필요성으로 인해 3년제인 관립경성공업학교로 개편된 데 이어 1939년 대방동으로 교사를 이전한 후 5년제인 경성공립공업학교로 다시 개편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서울공립공업중학교를 거쳐, 1994년 서울공업고등학교가 돼 2020년 현재에도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학교로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1길 46[대방동 390-5]에 위치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13호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서울공업고등학교는 1899년 설립된 관립상공학교[경성공업학교의 전신]에 연원을 두고 있다. 고종의 칙령으로 대한제국의 독자적 과학기술 향상을 위해 설립됐지만 대한제국의 식민지 전락으로 인해 제 기능을 상실했다. 이에 따라 경성공업학교는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시설 일부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형편이 됐고, 설비나 정원도 소규모로 전락했다. 1929년 졸업생이 총 32명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현상을 잘 나타내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일제는 1930년대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업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인 자본가들은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이용해 이윤을 남기기 위해 속속 한국에 진출했으나 기술인력의 부족이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키 위해 조선공업협회 주최로 1934년에 열린 전선공업자대회에서 공업교육기관 확충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갑종 중등학교 정도의 공업학교 설립을 조선총독부에 건의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기능을 상실한 경성공업학교도 주목받게 됐다.


1979년 5월 5일에 세운 韓國 實業敎育 發祥地(한국 실업교육 발상지) 비특히, 경성은 공업의 입지조건이 매우 양호해 이른 시기부터 경공업의 중심지역으로 인식됐다. 이로 인해 상당수 공장이 일찍부터 경성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들어섰고 1930년대 이후 공업과 과정에서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공업지대가 정책적으로 조성됐다. 여기에는 특히 기계공업이 크게 증가해 경성에 1936년 183곳이던 공장의 수가 1939년에는 251곳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제는 서울공업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경성공업학교를 확대 개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의 동숭동에 위치했던 기존 경성공업학교 교사는 부지가 협소해 이것을 그대로 확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대방동 부지로의 이전이 결정됐고 1939년 대방동 교사가 완공돼 이전했다. 이 때 서울공업고등학교는 경성공립공업학교로 개편해 5년제 학교가 됐다.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은 이때 지어진 건물이다.


서울공업고등학교는 1899년 고종의 칙령에 의해 설립된 관립상공학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관립상공학교는 1907년 2월에 통감부 공업전습소로 편입됐다가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 부속기관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관립상공학교는 1922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분리 독립됐고, 관립경성공업학교[3년제]로 개편됐다. 이후 1939년 경성의 대방동으로 교사(校舍)를 이전하고 이듬해 경성공립공업학교[5년제]로 다시 개편됐다가 해방 이후인 1946년 서울공립공업중학교를 거쳐, 1994년 서울공업고등학교가 되면서 2020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9년 5월 5일에 세운 韓國 實業敎育 發祥地(한국 실업교육 발상지) 비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은 지상3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은 붉은 벽돌로 마감하고 지붕은 모임기와로 건축됐다. 조형적 특징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견고한 외관 모습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정면은 좌우대칭으로 계획됐고 중앙의 출입문에는 두개의 원형기둥이 뻗어있어 권위적인 근대건축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측면 출입구 부분은 아치 형태를 가미해 외관에 변화를 줬다. 본관 정면 출입문을 들어서면 좌우 대칭의 계단홀에 바로 이어지고, 교실들은 계단홀 양편으로 길게 뻗어 있다.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은 외관과 내부공간 모두 당시의 건축모습이 최대한 유지, 보존돼 있어 근대건축으로서의 보존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연 면적은 4,239.1㎡이다.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은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로 등재됐다.


# 찬송가(UNION HYMNAL)


찬송가/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시진-박광준 기자])성삼위 하나님과 그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노래. 찬송가의 원형은 '시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노래들은 초대교회 당시 교회력에 따라 불려지다가 중세때교회 음악이 발달하면서 점점 찬양대를 위한 합창곡으로 발전하게 됐다. 그 후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라틴어풍의 찬송가는 자국어로 번역됐고, 영감을 받은 신실한 신앙인들이 신앙체험을 시(詩)로 표현한 일반찬송들이 더해져 오늘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시 형식의 많은 찬송들이 나온다. 


#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서울 舊 空軍士官學校 敎會 ]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서울 舊 空軍士官學校 敎會]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공원에 있는 과거 공군사관학교 교회로 사용했던 건물로,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보라매공원 터에 건립돼 성무교회라는 명칭으로 활용됐다. 공군사관학교가 충청북도 청원군으로 이전된 이후로는 특정한 용도 없이 방치됐다가 리모델링을 거쳐 2013년 동작아트갤러리로 재개관했고,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 건물은 보라매공원의 동북쪽 구역,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의 서쪽면과 마주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 건물은 건축가 최창규의 설계로 1964년 7월 22일 준공됐고, 건축비용은 당시 미 공군 장병과 국내외 신자들의 성금 28,000달러를 모아 충당했다. ‘성무교회’라는 이름으로 종교시설로 사용됐으나 1985년 공군사관학교가 충청북도 청원군으로 이전하고 기존 부지가 보라매공원으로 변동되면서 교회 조직도 이전하게 됐다.


이후 건물의 사용목적을 잃고 방치돼 창고 등으로 이용되다가 2011년 동작구와 서울특별시, 공군본부가 MOU를 체결하면서 7억원의 사업비[공사비 6억원, 설계 및 감리비 1억원]를 투입해 건물의 리모델링을 실시했다. 그 결과 2013년 동작아트갤러리로 재개관해 운영되고 있다.


당시 성무교회(공군자료)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 건물은 지붕형태가 급경사로 디자인돼 정면에서 보았을 때 이등변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내부 공간은 수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교회건축 양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건축기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 구 공군사관학교 교회 건물은 1동 1층의 건물로 종탑을 포함한 총 등록면적이 462㎡, 내부공간은 392.96㎡ 규모이다.


2020년 현재 동작아트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예술품 전시와 공연, 강연이 가능한 전시&다목적룸, 회의와 교육을 위한 공간인 세미나실, 휴게공간 및 소규모 모임공간으로 활용되는 커뮤니티룸으로 구획돼 있고, 동작구에서 열리는 문화예술 전시 및 축제, 기획세미나 등에 활용되고 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大韓民國 臨時政府 還國記念 二十三人 筆墨) 


[박광준 기자]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3인이 1945년 11월 4일 중국 중경에서 쓴 휘호들을 모은 서화첩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돼 26년 동안 중국 각지를 떠돌면서 항일운동을 해왔다. 1932년 항주(抗州), 1937년 남경(南慶), 한구(漢口), 1938년 광주(廣州), 유주(柳州), 1939년 귀양(貴陽) 등을 차례로 거쳐서 1940년 9월부터는 중경(重慶)에서 해방될 때까지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계속된 자금난과 인력난, 독립군 양성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일제의 온갖 침탈과 방해공작을 막아내면서, 독립운동 세력 내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한 결과 1942년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세력인 민족혁명당 계열이 임시정부로 흡수돼 명실공히 좌우를 막라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가 됐다. 그러나 1945년 9월 이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키 위해서 임시정부의 자격과 명칭으로 일시에 귀국하는 것을 불허했기 때문에 해방 후 3개월 이상이나 귀국이 지연되다가 교섭 끝에 마침내 개인 자격의 형식으로 2차례에 걸쳐 귀국하게 됐다.


임시정부 1진이 귀국하기 전날인 1945년 11월 4일 충칭에서 대기하던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은 한 자리에 모여 귀국의 감격과 해방의 기쁨을 다시 한번 자축하고 귀국 후에 건설할 독립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각자의 뜻과 의지, 결심 등을 3m가 넘는 한 장의 종이에 피력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이 완성됐다. 필묵의 주된 내용 중에는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강한 민주국가 건설을 위해서 대한 동포가 합심하고 협력키 위해 설득하는 유세 내용이 많으므로 일명 ‘재유기념첩’이라고도 불린다.



주석 김구(金九)[1876~1949]는 “변하지 않는 자주독립의 의지와 신념으로 변화가 극심한 국내외 정세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썼고, 부주석 김규식(金奎植)[1881~1950]은,“만리에 펼친 희망찬 여정에 독립운동의 위대한 공적을 여기 알리노라”라고 써서 독립투사의 자긍심을 표현했다. 또 ‘만호(晩湖)’라는 호를 쓴 글에서는 “둘째 아들 김진동과 함께 귀국하겠다.”고 써서 일찍 고아가 된 이후 중국과 러시아 등지를 다니면서 아내와 장남을 사별한 슬픔과 해방을 맞는 기쁨을 함께 표현했다.


임시정부의 군사 전문가였던 조성환(曺成煥)[1875~1948]은 을유년(乙酉年) 늦가을에야 조국으로 귀환하게 되됐다면서 “큰 지혜는 때로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위대한 용기는 겁장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해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는 참다운 지혜와 용기를 가질 것을 촉구했다. 임시정부의 초창기 부통령이었고 해방 직전에는 국무위원이자 재무부장 등을 역임한 이시영(李始榮)[1869~1953]은 “오직 정성을 다해야만 하늘을 움직일 수 있고 지극한 정성으로만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썼다. 김구의 비서이자 외교부장이었던 엄항섭(嚴恒燮)[1898~1962]은 자력갱생(自力更生)을 외쳤고,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민족혁명당계 김성숙(金星淑)[1898~1969]은 “자유롭고 행복한 신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분투하자”고 썼다.


만주에서 수 차례 항일 전투에 중국군과 함께 참여했고 중국 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한인특별반의 교관을 지냈던 조경한(趙擎韓)[1900~1993]은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자”고 했다. 민족혁명당 계열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윤기섭(尹琦燮)[1887~1959]은 순한글로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을 때 가시덤불이 걱정되지만 날랜 연장을 가졌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여 신국가 건설의 자신감과 의지를 피력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든 독립운동 세력의 단합을 촉구했던 유림(柳林)[1894~1961]은 “여러가지 좋은 방책과 여러 세력의 협력으로 자립하고 자강하자”고 역설했다. 임시정부의 학무부차장과 문화부장 등을 역임하고 해방 후에는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김상덕(金尙德)[1891~1956]은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분발하고 투쟁하자”고 촉구했다.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는 “아직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자”고 썼다. 일제 하에서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김약수는 민족혁명당 김원봉의 친구로서 국한문을 혼용해 쓴 필묵에서 “새로운 국가는 새로운 청년이 건립해야 하는데, 새로운 청년이란 새로운 사상을 확고하게 갖춘 사람을 말한다”고 역설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에는 1940년대에 와서 임시정부에 합류한 사회주의 민족운동 세력인 민족혁명당 계열의 인사들의 글이 유독 많이 발견되는데, 한결같이 민족의 대단결과 협동을 부르짖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23인 필묵은 귀국 후 김구나 김규식 등 개신교 장로교회의 김양선 목사와 친교가 있었던 인사 중 하나가 한국 그리스도교 제파의 연합으로 건립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9년 6월 5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관해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을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755호로 지정했다.


1919년 이후 26년간 중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벌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8.15 해방으로 조국에 귀환하게 됐다. 중경에 머물던 11월 4일 저녁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과 행정 각부의 주요인사들 23명이 귀국을 하루 앞두고 한 자리에 모여서, 해방의 감격과 독립의 기쁨을 만끽하고 자주독립국 건설의 의지와 결의를 다진 소회를 붓글씨로 써서 필묵으로 남기게 됐다. 그러나 이 필묵을 누가 언제까지 보관했다가 귀국 후 서울 남산에 자리잡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23인 임정요인들의 대표로 주석이었던 김구나 부주석 김규식이 이 필묵을 보관했다가 그들이 귀국한 후에 잦은 교류를 해오던 개신교회 측 김양선 목사에게 기증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은 1축, 23.0㎝×311.5㎝의 크기이고, 각 22.3㎝×11.5 ㎝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직까지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다. 다만, 2020년 현재 보관 중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 유물들을 도록으로 발간할 때 1~2차례 부분적인 사진을 공개했고 2019년 6월 문화재청에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키 위해 박물관장 황민호 교수가 언론과 인터뷰할 때 한 차례 더 부분적으로 공개됐을 뿐이다.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밝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에 참여한 인사들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겸 통수부 주임 조성환, 국무위원 이시영, 조경한, 김성숙, 유림, 외교부장 엄항섭, 문화부장 김상덕, 내무부장 신익희, 생활위원회 위원장 윤기섭, 국무위원 김원봉의 친구였던 김약수 등이다. 이들 중 다수는 한문으로 글귀를 남겼고, 일부는 한글 또는 국한문 혼용으로 쓴 것도 있다. 글씨체는 다양하여 해서(楷書), 행서(行書), 행초(行草) 등이고, 각자 문장의 마지막에 쓴 사람의 호 또는 이름을 명기했고 일부는 날짜를 명기했는데 ‘귀국전야’로 표기하거나 11월 4일로 돼 있다. 다만 해방되던 1945년을 ‘을유년’이라고 간지식으로 표기한 것이 많고, 임시정부 기년을 사용해 27년으로 표기한 것들도 있다. 또 이름 밑에 싸인을 하거나 인장을 찍은 경우도 다수 있다.


2019년 6월 한국기독교박물관의 황민호 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조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각자가 품고 있던 뜻과 의지를 피력하여 그들이 품고 있는 의식과 시대상까지 살펴볼 수 있다.”고 필묵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대동단결(大同團結), 자립(自立), 자유(自由), 신사상(新思想) 등의 용어가 많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은 한국 독립운동의 대표적 단체였던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들이 광복의 기쁨과 신국가 건설의 희망을 피력한 서화첩으로 1945년 11월 4일 중국 중경에서 기록된 것이다. 필묵에는 26년간 지속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 속에 내포된 온갖 역정과 고난을 극복한 독립투사들의 정성과 노력, 애국적 희생, 자긍심 등이 배어 있고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좌우합작 운동을 통한 자주적 통일민족정부 수립의 의지도 간접적으로 피력돼 있는 소중한 독립운동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소방 헬기 까치2호



소방 헬기 까치2호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보라매안전체험관에 전시되어 있는 퇴역 소방헬기로, 1979년 12월 서울소방항공대가 발족하면서 도입된 국내 최초의 소방헬기 2대 중 하나이다. 2005년 퇴역한 이후 보라매안전체험관 야외에 전시됐고, 대한민국의 소방 역사와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4월 5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1970년대 서울시는 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고층 건물이 크게 늘었으나 소방력의 확보는 이에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979년 4월 22일 라이온스호텔 화재 등의 고층 건물 화재 참사를 계기로 소방헬기의 도입이 진행됐고, 1979년 12월 소방헬기의 도입과 함께 서울소방항공대가 발족했다. 도입 기종은 미국휴즈(Hughes)사의 휴즈 500으로, 서울시 예산 1억 5천만원을 들여 대한항공을 통해 1대를 발주하고 한국화재보험협회로부터 1대를 기증받아 총 2대를 도입해 각각 까치1호[SMG 791], 까치2호[SMG 792]로 운용했다. 이 중 까치1호는 1996년 항공 방역 작업 도중 중랑천변에 추락하여 폐기되었으며, 까치2호는 이후로도 소방헬기로 운용되다가 2005년 퇴역해 2021년 현재는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국가등록문화재로서 야외 전시 상태에 있다.



까치2호의 실 활동기간은 1980년 1월 9일부터 2005년 6월 30일까지이고, 그 동안 3091회를 운항하면서 2983시간 45분의 비행시간을 기록했다. 주요 활동기록으로는 인명 구조 344회 942명, 산불 진압 450회, 소방 훈련 309회, 방역 방제 1512회 등이 있다. 이러한 활동 중 1984년과 1990년 강동구 수해지역에서 수재민 800여명을 구조한 바 있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 및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구조 활동 및 공중 지휘 통제를 수행하기도 했다.


소방 헬기 까치2호는 휴즈 500 헬기를 베이스로 해 소방헬기로서의 역할 수행을 위한 장비를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인명 구조를 위한 기중기와 인명구조낭, 공중 진화를 위한 소화약 공중살포 분사기, 사이렌으로 공중통제를 수행키 위한 2개의 스피커, 야간 수색용 서치라이트 등을 운용할 수 있었다. 현재는 엔진을 탈거한 상태로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전시 중이다./사진-박광준 기자,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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