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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서울에서 순교한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3-01-07 03:48:58
  • 수정 2023-01-09 01: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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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회장: 조선 이름 이치문, 그의 아내 권 바르바라, 그의 딸 아가타

[우성훈 기자] #아우구스티노 이치문


아우구스티노 이치문은 저명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처음에는 외인이었고 노름에 탐닉해 나쁜 생활을 했다. 30세가 됐을 때 아내와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과거 생활을 뉘우쳐 울고 지극한 열성으로 종교생활을 준행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삶이 변한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그에게 탄복했다.



그는 여러 차례 박해를 받는 동안 재산을 모두 다 잃었으나 평온한 마음으로 이를 감수했다. 나날이 더욱 열성적으로 천주를 섬기면서 냉담한 신자들을 격려했고 외인들을 진정한 천주께로 전향시켰고 많은 이들을 회두시켰다.


1839년 음력 2월경 열 명이 넘는 가족과 함께 체포돼 심문 법정(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관장이 그를 가혹하게 고문하면서 천주를 버리고 다른 신자들을 배신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의 항구함에 지쳐서 판결 법정인 형조로 이송했다.


판관은 처음에 아우구스티노의 아이들(남매)을 온화하게 타일렀으나 용맹하게 대항하는 그들을 고문하도록 명했다. 무수한 고문에도 그들의 항구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판관이 포기하고 그들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법률이 어린이의 참수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판관은 그들에게 형을 선고하지 못하고 다시 심문 법정(포도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때 판관이 아우구스티노에게 말했다. "만일 네가 천주님을 버리면 너뿐 아니라 네 아내와 형제들과 자녀들을 석방하겠고 모든 재산도 되돌려 주겠다."


아우구스티노가 대답했다. "천주님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자 판관이 분노해 그를 고문하도록 명하고 나서 말했다. "너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마는 네 아내와 자녀들은 어찌하여 구하려 하지 않느냐?" 그리고 포졸들을 향해 말했다. "죽도록 매를 쳐라." 그는 온몸의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로 뒤덮였다. 둘러서 있던 자들은 너무나 끔찍해서 감히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는 이렇게 세 차례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사형선고를 받아 음력 4월 12일 순교의 팔마를 받았다.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이광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廣州)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해 회장으로 임명됐다. 거듭되는 박해로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하게 살면서도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면서 외교인에게 전교했다. 그리고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했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신자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 주어 이광헌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돼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刑問)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된 그는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온 몸이 피범벅이 됐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냈다.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5월 24일 남명혁(南明赫)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아우구스티노의 아내 권희 바르바라



바르바라는 외교인이었다가 천주께로 전향한 다음 열절한 마음으로 천주를 섬겼다.


여러 차례 박해에 시달려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어도 그녀는 지극한 인내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감수했다. 자기집에 공소를 차리고 주교와 신부들을 영접해 정성껏 시중들었다. 그리고 성사를 합당하게 받도록 다른 이들을 자주 권면했다. 1839년 음력 2월 25일 한밤중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가족을 체포해 심문 법정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자녀들에 대한 본능적 애정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그곳에서 모든 형벌을 이겨낸 다음 판결 법정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세 차례 고문을 당한 후 1839년 음력 7월 26일 영광스러운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그때 나이가 46세였다.


이광헌의 부인이며 이 아가타의 어머니인 권희는 1817년경 남편과 함께 입교했다. 박해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회장을 맡은 남편을 도와 주교와 신부들을 맞아들였고 또 교우들을 권면해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했다. 1839년 4월 7일 가족과 함께 체포돼 포청과 형조에서 수차의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특히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끝내 모정을 억제하고 온갖 유혹과 형벌을 견디어 냈다. 이렇게 처참한 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아우구스티노의 딸 아가타



심문 법정에 이송된 아가타는 잔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항구했다. 이 연약한 작은 육체는 전염병에 걸렸으면서도 3백 대 이상의 태형과 치도곤 90대를 맞았다. 마침내 1839년 음력 11월 5일 목이 졸려 천주께로 날아갔다.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과 권희(權喜)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 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을 했다. 기해박해 초인 1839인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돼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뒤 형조로 이송됐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다시 보냈다. 포청에서는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이 아가타에게도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90대를 맞고,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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