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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60] 민족대표 33인 중 1인 '박준승'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2-19 22:36:22
  • 수정 2023-04-03 19: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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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박준승 朴準承, 1866.11.24 ~1927.03.23. 전라북도 임실, 대통령장 1962


“조선은 4천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는 고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아니하면 안될 줄로 생각한다.” - 선생의 공판기록 중 진술내용 -


# 외세와 봉건 지배층의 침탈을 보며 현실에 눈뜨다


박준승(朴準承, 1865. 11. 24∼1927. 3. 24) 선생은 1865년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에서 출생했다. 선생의 호는 자암(泚菴)이다. 어려서부터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던 선생은 20대에 이르러 현실 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개항 이후 물밀듯이 몰려드는 외세와 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은 점차 우국청년으로 성장했다. 특히 일본과 청국 상인들이 공산품을 가져와 비싸게 팔고 그 대신 싼 값으로 미곡을 구입해 대량으로 반출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은 선생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럼에도 당시의 양반 지배층은 도탄에 빠진 민생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급급했고, 나아가 외세와 결탁하여 일반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있었다. 농업을 생업으로 하던 선생은 그 같은 외세와 봉건 지배층의 침탈을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반(反)침략, 반(反)봉건의 운동방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그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대민족운동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선각적 양반을 중심으로 중인 지식인과 양인 상공업 자본가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위로부터의 개화, 개혁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반 민중이 주체가 된 밑으로부터의 혁명운동이었다. 전자의 운동이념이 된 것은 개화사상이었고, 후자의 운동이념이 된 것은 동학사상이었다. 


전라북도 임실군에 소재한 선생의 유허비그러나 외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개화사상은 필연적으로 반(反)외세의 문제에 취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외세의 침탈로 궁핍화 현상이 심화돼 일반 민중에게는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제창된 동학사상은 본래 종교이념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이 구체화되고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상황에서 그를 극복하려는 사회 변혁이념으로 전화하여 기능하면서 일반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획득해 갔다.


# 동학에 입교 후 민족의식 고취활동


선생은 민중의 입장에서 반침략, 반봉건의 동학사상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1891년 동학에 입교했다. 이 시기 동학은 제2대 교주 최시형의 헌신적 노력으로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전국적인 포교조직을 구축해 비약적인 교세확장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기반으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통한 포교의 자유를 획득키 위해 1892년 전북 삼례와 1893년 충남 보은 등지에서 대중적인 집회를 개회해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특히 보은 집회에는 2만여 명의 동학교도가 참여해 교조 신원은 물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와 ‘제폭구민(除暴救民)’ 등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였다. 1894년 1월 고부(古阜)민란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이 발발하자, 동학교도이자 농민대중의 한 사람으로 선생 또한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호남 일대에서 생명을 담보로 투쟁했지만,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실패함에 따라 외세를 몰아내고 봉건체제를 타파해 자주적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려던 선생의 꿈이자 당시 민중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금일 공판 시작되는 朝鮮民族代表 사십팔인의 肖像이후 선생은 이른바 ‘동학잔당’을 색출해 잔혹하게 학살하는 일제와 친일 정권의 촉수를 피해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결코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동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1897년 전라도 지역의 동학 접주로 선임된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와해된 포교조직을 재건하고 교세를 만회하기 위해 혼신의 정력을 쏟아 부었다. 1904년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개화운동단체 진보회가 조직되지만 진보회가 친일단체 일진회로 변질되자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일진회 주동자를 처단해 사회개혁과 민족종교로서의 정통성을 수호했다. 이때 선생은 전라도의 유력한 접주로서 동학의 갑진(甲辰)개혁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손병희와 박인호를 추종하면서 이용구 일당에 대항하여 교인들을 수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주권수호운동에 앞장섰다.


# 천도교 전라도 순유 위원장으로 활동


이후 선생은 1908년 천도교 수접주(首接主)가 됐고, 1912년부터는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6년 선생은 천도교 전라도 도사에 임명돼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전파해 갔다. 이 같은 선생의 활동은 민족 독립을 염원하는 선생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 천도교 교단의 뜻이기도 했다.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흑과 같은 시기임에도 천도교는 각종 교리강습회와 수련회를 개최해 암암리에 민족의식을 배양하면서 민족의 앞날을 열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부터 천도교도들을 동원해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교주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는가 하면, 1917년에도 같은 요청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의 발의로 우선 천도교, 기독교, 유림 3종단이 연합하고, 사회계와 구관료계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까지 했다.


33대표의 소식(독립신문 1922년 3월 1일자)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교서에서 제1차 대전 이후 강화원칙의 일환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해 갔다. 이들은 중앙학교측의 인사들과 합세해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1919년 1월 상순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밀사로 국내에 파견한 송계백으로부터 2.8독립선언 계획을 듣게 됐다. 이에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이같이 의거를 감행하려는 이때에 우리 선배들로서는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독립운동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했다. 이에 기독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됐고, 여기에 학생층이 참여해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함에 따라 3. 1운동 계획은 일원화돼 일사불란하게 추진됐다.


선생은 3.1운동 계획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인 2월 24일 천도교 전라도 도사로서 교주 손병희에게 기도회의 종료를 보고하고, 1월 21일 붕어(崩御)한 광무황제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선생은 손병희를 방문한 뒤, 이어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났다. 이때 선생은 그로부터 “총독부에 건의서를 제출하여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본래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인 만큼 찬성한다” 라고 주저 없이 말하면서 3.1운동 계획에 참여했다. 이로써 선생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임예환, 권병덕,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홍병기, 양한묵, 이종훈, 이종일 등과 함께 천도교측 민족대표 15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돼 독립선언서와 독립통보서 등에 서명 날인하게 됐다.


#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독립선언식 참석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한용운이 대표로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는 요지의 식사(式辭)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는 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운동의 불을 지폈다. 


박준승 판결문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됐다.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라는 일경의 질문에, “조선은 4천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는 고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아니하면 안될 줄로 생각한다” 라고 대답해 항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법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조선 독립이 될 줄 믿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거침없이 대답해 민족 독립에의 확고한 신념을 분출하였다. 나아가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라고 묻자, 선생은 “금후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고 답변함으로써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독립정신을 드러냈다.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이후에도 선생은 천도교의 교역자로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밝힌 대로 재차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다가 1927년 3월 24일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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