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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선생묘'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5-22 0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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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있는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의 무덤으로 시도기념물이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위치한 이 묘역은 직계 후손이 없어 방치됐으나, 1967년 5월 성호이익 추모회에 의해 묘역이 정비됐다. 이때 묘비를 포함해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새로이 건립됐다. 1977년 10월 13일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이익(李瀷, 1681~1763)의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성호(星湖)로,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로, 1705년(숙종 31년) 증광문과(增光文科)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이듬해 친형이자 스승인 이잠(李潛)이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 첨성촌(지금의 안산시 성포동)에 머물면서 일생을 학문에 전념했다.



#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풍과 실학정신


이익(李瀷, 성호 星湖, 1681-1763)은 18세기 전반에 그 시대의 여러 사상조류를 종합하고 다양한 문제의식을 통해 실학의 학풍을 일으켜 성호학파(星湖學派)로서 발전시켰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사상가이다. 20세기 전반에 활동하던 정인보가 조선 후기의 실학파에서 유형원.이익.정약용을 3정점으로 제시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실학자로서 그의 비중과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익은 주자를 표준으로 삼은 도학의 학풍과 새로운 사상조류로서 실학의 학풍을 동시에 포용하였던 인물이다. 먼저 그는 경학.성리학.예학의 도학 전통적 학문영역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곧 그는 유교 경전과 전통의 고전들을 ‘질서(疾書)’라는 형식으로 주석했는데, 그가 가장 먼저 쓴 경전의 주석은 '맹자질서'이다. ‘질서’라는 말은 자기가 경전이나 고전을 독서하면서 생각하고 깨달은 바를 그때그때 빨리 적어 갔다는 의미로서, 고증적 검토가 아니라 자신의 통찰력에 따른 견해를 제시하는 그 자신의 독특한 주석체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의 광범한 경전 주석은 성호학파 말기에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이 이룩한 방대한 경전 주석의 선구적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心)개념을 혈육심(血肉心)과 신명심(神明心)으로 분석해 심신의 관계를 간결하게 제시한 심성론(心性論)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성리학의 문제에 대해 그는 퇴계 이후에 발생됐던 ‘사단칠정논쟁’의 쟁점들을 종합적으로 재정리해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저술했고, 퇴계의 말씀과 행적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을 뽑아서 '이자수어(李子粹語)'를 편찬했다. 여기에서 이자는 이황을 가리키는데 퇴계라는 도학의 대표적인 인물을 정리하고 학풍을 체계화할 정도로 도학적인 소양이 풍부했던 사람이 성호였다. 예학적 저술을 보면 퇴계의 예설(禮說)을 수집하고 분류해 '이선생예설유편(李先生禮說類編)'을 편찬함으로써 퇴계의 예학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이익 자신의 예설에 관한 왕복문답이나 다양한 논설들이 그의 후학들에 의해 정리돼 '성호예설유편(星湖禮說類編)'으로 편찬됐다. 이와 함께 ‘질서’의 체제 속에서 예학적 저술로 주자의 '가례'를 주석한 '가례질서(家禮疾書)'를 저술했다.


이익이 도학체계를 벗어난 학문영역에 보여 준 관심으로는 크게 양명학-심학과 서학을 들 수 있다. 먼저 그의 양명학에 대한 이해는 '성호사설'에서 퇴계의 양명학 비판을 소개하면서 비판적 입장에 서면서도 동시에 왕양명이 제시한 ‘십가패법(十家牌法)’의 제도가 간악함과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실시할 만하다고 긍정하고 있다. 성호학파의 후학인 권철신(權哲身).정약용(丁若鏞) 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양명학(陽明學)의 이론에 긍정적 수용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서학에서도 특히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의 실학사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고 있다.



그는 실학사상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경세론에 관해 다양한 문제를 검토하는 논설들을 남기고 있다. 곧 인재를 채용하는 문제('논용인(論用人)'), 토지제도에 관한 논의('논전제(論田制)'), 조세제도에 대한 검토('논부세(論賦稅)'), 화폐제도에 대한 반성('논전폐(論錢幣)'), 군사제도에 대한 검토('논병제(論兵制)') 등 당시의 사회제도에 대한 폭넓고 다양한 논의들을 하고 있으며, '곽우록(藿憂錄)'은 그의 정치론에 대한 종합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실학의 개방적 정신을 발휘해, 천지(天地).인사(人事).경사(經史) 등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을 수집해 논평하고 소개하는 백과전서적 작업을 수행해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저술함으로써 도학의 정통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학적 관심의 다양한 지식들을 집성하고 있다.


그의 실학정신은 조선 후기 도학이 의리의 핵심 과제로 표방하고 있는 화이론의 입장을 극복하고 있다. 그는 멸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의 사용을 거부했다. ‘화이론’을 대의로 내세우는 도학자들은 청을 오랑캐로 배척하고 멸망한 명을 중국문화의 정통으로 재확인하면서 멸망한 명의 연호를 쓰고 있었고, 여전히 明을 조선의 종주국으로 받들어 ‘명나라 안의 조선’(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숭정’ 연호의 사용을 시대 현실에 부적합한 것으로 비판하고, 중국 역시 대지 위에 있는 한 조각의 땅일 뿐이라 말하여 중국 중심의 천하의식을 깨뜨리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그는 놀고 먹는 신분계층이 되고 있는 ‘선비’를 도태시킬 것을 강조하고, 선비도 생산노동에 종사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사대부가 노동계층을 착취하고 지배계층화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점을 성찰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자신도 생산노동을 통해 살아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좀벌레’라고 격하하면서, 농민들의 생산을 소모하는 양반계급의 비생산성을 비판했다. 따라서 그는 선비로서 농민이 돼야 한다는 ‘사농합일론(士農合一論)’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토지개혁론을 구체화시켜 균전론(均田論)을 제기했는데, 그것은 ‘영업전(永業田)’이라는 토지의 기본단위를 영구히 지속시키고 매매를 금함으로써 빈곤한 농민의 토지가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해 겸병당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의 행정개혁론 속에도 다양한 개혁방책들이 포함돼 있다. 그 중요한 대책들을 들어 보면 ‘의정부(議政府)’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주장하고, 고과(考課) 제도의 개혁을 강조하면서, 언로(言路)를 넓힐 것 및 인사행정을 통괄하는 ‘총장사(總章司)’를 신설할 것 등을 주장한다. 또한 인재선발 문제에서는 과거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시험을 통한 과거 제도와 천거를 통한 공거(貢擧) 제도를 병행할 것을 주장하고, 지방의 군.현을 통합시켜 관리의 숫자를 줄임으로써 백성의 부담을 줄일 것을 주장했고, 연좌법(緣坐法)의 폐지를 역설하고, ‘병농합일(兵農合一)’의 군사제도를 확립하도록 강조하고, 양민과 천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시키는 ‘양천합일(良賤合一)’의 향병(鄕兵) 조직을 제안하는 등 사회제도의 광범한 개혁을 추구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수원과 인천간 산업 도로가 바라보이는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의 석물로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600㎝×550㎝×220㎝이다.


묘비는 이익의 사후 204년이 되는 1967년에 건립됐다. 비의 규모는 높이 146㎝, 너비 57㎝, 두께 26㎝이며 묘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이다. 전면에는 ‘성호선생이공휘익지묘 증정부인고령신씨부좌증정부인사천목씨부우(星湖先生李公諱瀷之墓 贈貞夫人高靈申氏祔左贈貞夫人泗川睦氏祔右)’라 새겨져 있다. 뒷면 묘갈명의 글은 정조대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것이고, 글씨는 인천 출신인 현대 서예의 대가 검여(劒如) 유희강(柳熙綱)이 쓴 것이다.


묘소는 남향을 하고 있다. 묘소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설치돼 있고 묘소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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