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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57] ‘공작포란형’,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듯 상서로운 기맥이 흐르는 곳 ‘국립묘지(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7-23 18:42:39
  • 수정 2024-04-10 10: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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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서울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묘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으로, 관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동작의 능선이 병풍치듯 감싸고 있고, 앞쪽으로는 한강수가 굽이쳐 흐르는 43만평의 포근한 땅에 마련되어 있다. 


즉 지형적으로 관(冠)을 쓴 듯 봉우리가 솟았다 해 관악산이고, 붓끝과 같이 뾰죽한 형세라 해 문필봉이라 일컫는 산세로 감싸여 있다. 이들 산세 속의 펑퍼짐한 지형을 ‘공작포란형’이라 하는데, 마치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듯 상서로운 기맥이 흐르는 곳이다. 또한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군대좌형’이기도 하다. 



더 자세히 보면 좌청룡의 세는 전면에 한강수가 용트림하듯 호위하는 형상으로 흐르고 있어 미관을 겸하고 있다. 우백호의 세는 금기의 호랑이가 머리를 순하게 엎드리고 머무는 형상이다. 안산을 보면 장필봉이 멀리 앞면 전체를 감돌아 주객이 다정하게 앉은 모양이며, 조산은 문필봉으로 높이 솟아 양각을 이뤄, 마치 물소뿔 모양을 하고 있어 선동이 달을 희롱하는 형국이다. 


수세(水)는 서출동류로 합수가 돼 양수합금의 수법이 되는데, 특히 한강물은 동출서류로서 명주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꿈틀거리며 공작봉을 감싸고 흘러내리고 있다. 이와 같이 국립묘지는 산수의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 건립배경



일찍이 국군창설 이래 조국을 수호하다가 죽은 이들은 서울 장충단공원 내에 있는 장충사에서  모셔왔었다. 그러던 중 6.25동란이 발발하자, 전쟁터에서 전사한 이들을 부산에 있는 범어사, 금정사 등 주요 사찰에 임시로 봉안하게 됐다. 그러나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전사자 수가 증가하자, 전국 곳곳에 이름없는 넋으로 산재했던 국군장병들을 한곳에 안장하기 위해 1955년 7월 15일 현재 위치하고 있는 동작동에 국군묘지를 설립하게 됐다. 


1953년 9월 11일부터 5일간의 정밀조사를 거쳐 1954년 본격적인 묘지 조성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국 주관 아래 묘지조성을 위해 답사반을 편성해 1차로 대구와 경주지방을 물색하던 중, 경주 형산강 지류에 북천대안 일대를 선정하려 했으나, 당시 고위층에 의해 부결됐다. 국가적인 성지이며 조국의 역사적 상징이 될 충령들의 보금자리인 만큼 묘지선정에 신중을 기한 끝에, 1955년 7월 15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관악산 줄기 43만여평(140m2)의 대지에 국립묘지가 창설됐다. 3년에 걸친 공사로 1957년에는 총면적 37만 4천여평의 묘지가 준공됐다. 그 중 무덤터는 9만여평이고 나머지 당에는 숲과 길, 광장과 여러 시설물이 자리잡고 있다. 



1954년 3월 1일 국군묘지라는 이름으로 공사에 착공해 1954년 10월 30일에 무명용사탑과 무명용사문이 건립됐고, 1955년 6월 30일 관리사무실이, 1955년 7월 20일 봉안관이 건립됐다. 그 뒤부터 묘역조성과 기본업무 수행을 위한 건축물 신축에 주안을 둬 1958년 6월 30일 분수대가, 1961년 12월 5일 봉안관을 개조해 유품.전리품 등을 전시하는 전젱기념관 개관과 함ㄲ 경내 도록포장을 했고, 1967년 9월 30일에는 현충탑을 건립했다. 


1968년 4월 30일에는 현충문을 건립하고, 같은 해 8월 15일에는 현충관과 휴게실이 건립됐다. 그 뒤 1971년 11월 17일에는 애국지사묘역에 충열대를 제막했고, 1977년 2월 12일에는 분수대를 개조해 충성분수탑을 건립했고, 1980년 12월 31일에 현충관을 새로 건립했고, 1984년 1월 31일에는 유가족 휴게실을 개축해 유가족 안내실로 활용했다. 또한 1985년 10월 30일에는 현충관 앞에 휴게시설을 갖춘 연못을 조성해 참배객의 휴식공간을 만들었고, 1988년 3월 29일 현충관을 개관했다.


# 묘역 



현충탑을 중심으로 동.서쪽에 묘역이 위치해 있다. 이 묘역은 다시 국가유공자 묘역, 애국지사 묘역, 장군 묘역, 장교사병 묘역, 경찰관 묘역 등 각 신분별로 나뉘어져 있다. 


국가유공자 묘역에는 국가발전과 만족 번영을 위해 생애를 바친 국가유공자 50여 위가 잠들어 있고, 이곳에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 버마 아웅산 순국 외교사사절,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도 모셔져 있다. 



애국지사 묘역에는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됐던 을사조약 이후 의분자결하거나 의병활동 및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강우규, 김상옥, 신돌석 등 애국지사 200여인 안장돼 있고, 후손이 없어제사를 지낼 수 없는 나석주, 유관순 열사 등 132인의 위패를 모신 무후선열재단이 있다. 특히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5인이 모셔져 있다. 



장군 묘역에는 광복 이후 국군의 창설과 발전은 물론 6.25동란, 대간첩 작전 등에서 전공을 새운 장성 200여위가 잠들어 있다. 


일반 묘역에는 6.25동란, 대간첩작전, 월남전 등에서 전사, 순직한 대령 이하의 국군장병, 향토예비군, 학도의용군, 군무원, 경찰관 등 5만 4천여 영령들이 모셔져 있다. 


장군묘역이 묘역에는 6.25동란 직전 송악산 고지를 육탄으로 탈환한 10용사, 훈련 중잘못 투하된 수류탄을 자신이 덮쳐 수십명의 부하를 구하고 산화한 강재구 소령, 인천상륙 작전시 중앙청에 제일 먼저 태극기를 게양한 양병수 해병상사, 간첩을 생포하고 순직한 계용현 경위, 국군파월 당시 전투지역 취재 중 순직한 동아일보 백광남 기자, 6.25 당시 피난민을 구출하다 순직한 기재관 철도기관사도 잠들어 있다. 


# 충성분수대



국립묘지정문에 들어서면 바로 앞에 충성분수대가 우뚝 서 있다. 1958년 6월 30일 건립시에는 로터리식분수대였으나, 1976년에 상징적 의미가 없어 철거하고 이일영의 실제로 현재의 분수대를 건립했다. 



화강암 좌대는 상.중.하로 나눠 만들어졌는데, 좌대의 남녀상은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고, 중간의 남녀노소 조각은 국민을 상진하고, 하단의 육.해.공군, 해병.경찰 및 예비군 조각은 국방을 상징한다. 분수대의 높이는 13m, 웥형 직경은 31.2m이고, 노즐이 30개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에는 두 마리의 청룡 동상이 조각돼 있다. 


# 현충문


현충문은 국립현충문을 상징하는 현충탑의 출입문으로 1968년 10월 1일 착공해 1969년 4월에 세워졌다. 건축양식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사당전 및 극락전을 본뜬 순 한국식이다. 그러나 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만 축조했다. 



이 문의 좌측에는 현충탑 참배시 귀빈들이 대기할 수 있는 귀빈실이 있고, 우측에는 직원이 상주해 현충탑 참배 안대 및 각종 방송을 실시하는 안내실이 있다. 그 동안 귀빈실과 안내실이 협소해 국빈 방문시 참배행사가 불편했던 것을 2010년 약5개월에 걸쳐 개보수 공사로 전체면적 375.15m2, 귀빈실 86.94m2, 안내실 75.6m2의 skfqdms 공간을 확보, 2020년 3개월의 개보수 공시로 여성편의시설을 설치해 국격에 걸맞은 경건하고 참배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현충문 입구 양쪽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상이 건립됐다. 이 호랑이상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두 마리의 호랑이가 지켜줄 것을 기원하는 뜻으로 건립한 것이다. 화강암 좌대(높이 413cm) 위에 웅크리고 있는 앉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호상은 높이 125cm, 폭 110cm, 길이 230cm이다.   


# 현충탑



현충탑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충의와 위훈을 추앙하기 위해 세워진 탑으로. 1967년 9월 30일 건립됐고 민족의 성지인 국립묘지를 상징하고 있다. 현충탑 앞 계단에 올라서면 왼쪽에는 큰 청동화로가 있고, 오른쪽에는 육.해.공군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향로가 놓여 있는데, 향오 속에는 무명용사의 군번이 새겨져 있다. 


현충탑에는 오석 편판으로 된 제단과 향로, 향합대가 지루하고 있다. 제단 뒤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와 함께 이은상 선생이 글을 쓴 헌시가 새겨져 있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꼐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향로는 중간이 막혀 있다. 윗부분을 향을 피할 수 있고 아래 부분에는 6.25전사자 및 파월장병의 인식표를 넣었다. 향로 위 원형 테두리에는 국방부와 육.해공군 및 해병대를 상징하는 마크가 조각돼 있다. 향로는 높이 80cm, 직경 80cm, 무게 300kg이다. 건국 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방부가 제작했고, 1968년 10월 1일 국방부장관이 각 참모총장 및 고위 장성들을 대동, 봉납했다. 


향로 오른쪽에 놓인 향합대는 오석으로 만들어졌다. 전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한 ‘충혼’이란 글자, 양 옆에는 무궁화 문양의 조각이 각각 새겨져 있다. 



탑의 좌우에는 화강암 석벽이 펼쳐져 있다. 좌측 석벽 끝에는 5인의 애국투사상, 우측 석벽 끝에는 5인의 호국영우상이 각각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현충탑 좌우의 석벽은 제사를 지낼 때 제상 뒤편에 쳐 놓는 병풍을 상징한다. 높이는 2.4m, 길이는 좌우 23m이다.


우측 석벽 면에는 6.25전쟁, 4.19의거, 조국건설, 영광, 애도 등을 상징하는 조각이 정교하게 부각돼 있다. 좌측 석벽에는 항일운동, 8.15광복을 상징하는 조각이 역시 정교하게 부각돼 있다. 석벽에 표현돼 있는 이들 조각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들의 고귀한 위훈을 기리고 있다.



현충탑 좌측 석벽 끝에 세워져 있는 애국투사 5인상은 국권 회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 순국선열들을 상징하고, 우측 석벽 끝의 호국영웅 5인상은 국토방위와 자유 수호를 위해 용맹을 떨치진 육.해.공군과 해병대, 경찰 등의 용사들을 상징하고 있다. 높이는 5.5m이다. 현충탑과 석벽의 벽면 부각, 동상 및 향로는 홍익대 최기원 교사가 설계.제작했다. 



현충탑 아래 내부는 위패봉안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에는 영현승천상 아래 지하에는 봉안실이 설치돼 있다. 



2010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현충탑과 부조벽을 세척하고 새롭게 코팅해 단장했다. 또 일반인 및 장애인의 출입 편의를 위해 제단 앞면의 경사로를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설하고, 노후된 계단석판석을 통석으로 개보수 공사를 실시했다.  


# 학도호국영령 무명용사碑



국립서울현충원은 1954년 3월 1일 국군묘지 착공을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 30일 6.25전쟁 전사자 무명용사비를 최초로 건립했다.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로 창설된 이후 1956년 1월 16일에 대표 무명용사 1위를 무명용사비 뒤편 반구형 봉안함에 안장하면서 ‘무명용사탑’으로 위상을 갖추게 됐다. 



1967년 9월 30일 현충탑 아래 무명용사 봉안실을 건립하게 돼, 무명용사탑은 현재의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으로 이전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으로 이전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분들을 모시게 됐고, 현충탑 아래 위패봉안관 봉안실에는 6.25전쟁 전사자 대표 무명용사 1위와 묘역에 안장돼 있는 무명용사 5천 여위를 합장해 모셔오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호국영령 무명용사의 거룩한 희생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다하기 위해 2021년 5월 21일 무명용사 봉안실 입구에 호국영령 무명용사비‘를 건립했고 묘비 후면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며추모하기 위해 묘비를 세우다‘라고 새겨 넣어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 무명용사의 넋을 영원히 기리고 선양키 위한 것이다.(묘비규격 : 가로 22.5cm, 높이 54.5cm, 두께 6cm, 상석은 가로 42.5cm, 세로 32cm, 높이 8cm)


# 호국종



호국종은 1973년 5월 8일 재향군인회에서 회원들의 성금으로 제작해 기증한 것으로, 무게가 2톤이고 직경이 1,221mm, 높이가 1,749mm로서 타종시에서 야간에 종소리가 12km 밖까지 들린다고 한다. 이 종은 현충문 오른쪽 순환도로 입구에 있는 6각형 종각 내에 설치돼 있다. 종각은 면적은 9.2m2로 고전 한국식 건물이다. 이 종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제작한 시가 새겨져 있다. 


’울려라 호국의 종소리

우렁찬 자유의 외침

충혼들 여기 이르러 웃음과 위로 받으옵소서

이 종이 울리는 곳에

청아한 평화의 여운

조국의 무구한 역사 길이 빛날지이다.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 육탄 10용사 현충비



이 현충비는 1949년 개성 서북방 송악고지에 북한군이 침입해 개성이 위태롭게 되자, 같은 해 5월 4일 1사단 11연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9명의 용사가 몸에 포탄을 지닌 채 적의 팜호 속에 뛰어 들어 육탄혈전으로 적진을 분쇄하고 산화한 것을 추모키 위해 세운 것으로, 1955년 4월에 준공해 5월 4일 전몰일을 기해 제막했다. 



이 비는 하단의 기단식 위에 5층의 탑을 쌓은 듯한 형상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데 하단에는 비문이 있고. 그 위에는 ‘THE TEN BRAVE WARRIORS’라는 영문이 표기돼 있고, 그 위에는 십용사의 계급과 성명이 새겨져 있다. 상단은 0.5m, 하단 2-3m, 바닥변적이 80.8m2이며, 중앙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처음에 흑석동 강변에 세워졌으나 그 자리에 도록 확장되자 1978년 5월 4일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위령비



이 전몰용사위령비는 1973년에 제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에서 세운 비로 서쪽 11번지 묘의 앞쪽에 세워져 있다. 높이 13m, 넓이 105m2이며, 비 전면에는 이은상의 헌시가 있고, 후면에는 자진해 현해탄을 건너와 각 지구 전투에서 산화한 재일학도의용군 51위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헌시는 다음과 같다. 


‘내 나라 구하려고 피를 뿌리신 젊은이들

역사의 책장 위에 꽃수를 놓으셨네

조국의 포근한 흙 속에 웃으며 잠드옵소서.’

  

# 육사7기 특별동기생 추모탑




이 추모탑은 생존한 동기생들이 1963년 10월 12일 세운 탑으로 1986년 10월 12일 개척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개축시 탑 안에 동기생들의 유품과 기념품, 사진 등을 함께 복안했다. 탑은 오석 기단으로 높이 1.3m, 너비 0.6m의 화강석 좌대를 쌓고, 그 위에 철근 콘크리트에 화강석 판석을 붙인 높이 6m의 탑신을 세우고, 탑신 꼭대기에는 원형 고리를 밟고 양팔을 벌린 채 서 있는 직경 3m의 군인 동상을 세웠다. 탑 하단 전면에는 6.25동란 때 쓰던 철모가 놓여져 있고, 후면에는 7기 동기생 203면의 명단과 동기생이 쓴 헌시가 새겨져 있다.



‘오랑캐 무찌르며 돌진하던 그대들

이 나라를 건져놓고 저는 정작 못돌아오고

충혼이 한줌의 흙으로 이 기슭에 누웠다.

그대들 푸른 넋이 가슴마다 살아있네

못 이룬 그 바램을 오늘도 되새기면

아쉽고 그리운 정으로 돌 하나를 세운다.’


# 현지 임관 전사자 추념비



이 전사자 추념비는 6.25동란 때 현지 임관으로 임명된 이들 중 생존 동기생들이 전사한 377인과 순직한 16인을 추모하기 위해 유족과 함께 성금을 모아 1971년 9월 1일 건립에 착수해, 같은 해 10월 20일 준공한 것이다. 



높이 7m의 철근 콘크리트 2개로 아취형으로, 각 아취형 날개의 높이가 1.7m이고, 비 아래쪽 기단 폭이 6m, 바닥면적 21.5m2인 이 비는 김세중이 제작한 것이다. 후면에는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들은 나라의 부름을 입어 창군하고

순국으로 침략을 막아 처사에 그 충의를 새기니

오늘은 번영 내일은 조국의 통일을 보리라’/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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