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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오면 머물던 '강릉대도호부 관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8-04 06:57:59
  • 수정 2023-12-21 10: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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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관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역사여행(1)



[박광준 기자] '강릉부 객사 건물인 임영관의 터이며, 객사(客舍)는 지방으로 출장온 중앙관리의 숙소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강릉의 객사는 "강릉부 읍지"(江陵府 邑誌) 건치 연혁에 따르면 '고려 태조 19년인 936년에 강릉을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을 창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규모 등은 확인할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되어 왔으며 일제시대 강릉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철거되었다. 강릉시청사 신축을 위해 수목의 채굴과 구 강릉경찰서 지하구조물의 철거 과정에서 임영관 건물지 및 조선시대·고려시대의 건물하부구조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1994년 7월 11일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부터 전통문화도시 도심관아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지내 전대청(殿大廳)·중대청(中大廳)·동대청(東大廳)·서헌(西軒)의 4개동 건물을 비롯한 석축, 담장 등 복원을 추진하여 2006년 완료하였다. 임영관지는 객사문 및 부사(府使)가 업무를 살폈던 칠사당(七事堂)과 함께 강릉의 관청건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강릉 임영관지(현지 안내문)는 






강릉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 官衙)는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에 있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로, 1994년 7월 1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88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됐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릉 임영관은 1993~1994년 발굴조사 결과 객사(客舍)인 ' 임영관'의 유구가 확인돼 1994년 7월 사적으로 최초 지정됐고 당시 지정명칭은 '강릉임영관지(江陵臨瀛館止)'였다. 2005년 9월에는 주변의 관아지를 추가 지정했고 2006년 객사 건물이 복원되면서 2011년에는 지정명칭이 '강릉 임영관(江陵 臨瀛館)'으로 변경됐다.




현재 지정구역 내에는 객사를 비롯해 지방관의 집무처인 동헌(東軒)과 아문의 운루 등이 복원됐고, 관청 건물인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에 객사 영역을 지칭하는 '강릉 임영관'의 지정명칭 변경 필요성이 제기돼, 강릉이 고려 말 ~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간동안 '강릉대도호부'로 명명된 점 과 '관아'가 객사, 동헌 등 읍치 공간을 아우르는 점 등을 고려하여 '강릉대도호부 관아'로 지정명칭이 변경됐다. 


다만, 복원된 강릉대도호부 동헌이 실제 동헌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일부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대도호부(大都護府)는 지방의 큰 고을을 다스리는 관청이다. 강릉대도호부는영조 때 출판한 임영지의 기록으로 볼 때 고려초기부터 1927년 1차, 1929년 2차 강릉보통공립고등학교를 세우기 전까지 천년 이상을 보존했으나 그 때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그 자리에 강릉경찰서를 세웠고, 1993년 강릉시청을 세우려고 신축기공식 후 관상수를 옮겨 심던 중 유물이 쏟아져 나와 발굴조사를 하고 복원하게 됐다.국보로 알려진 ‘임영관삼문’은 강릉시 임영로 131번길 6에 위치한 이곳을 강릉대도호부 관아를 오면 된다. 임영관은 임금이 먼 곳에 있어 직접 찾을 수 없으므로 임금을 대신한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곳에서 임금의 명을 받고 취임식, 초하루와 보름에 인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리고 중대청은 부사의 관사로 사용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1993년 강릉시가 시청사 신축을 목적으로 공사를 실시하던 중 건물지의 기단석렬 및 적심석이 확인됐고, 많은 양의 기와편 및 자기류가 확인돼 공사가 중지됐다. 이후 일대에 대한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의 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건물지가 확인, 사적지로 지정됐고, 이후 1998년에 정식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임영지(臨瀛誌)'의 기록에 의하면 936년(고려 태조 병신 19년) 강릉부 객사로 임영관을 창건하고 전대청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 6칸, 서헌 6칸, 월랑 31칸, (행)랑, 삼문 6칸 등 총 83칸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건물지 유구가 양호한 상태로 다양하게 나오고 있어 고려시대 이후 관아성격의 건물지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줌과 동시에 강릉 임영관의 객사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강릉대도호부관아는 동헌권역, 칠사당권역, 임해관권역으로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동헌권역은 건물들이 모두 깨끗하고 단청의 색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동헌건물은 관람 및 체험시설이었고, 그 옆의 별당은 작은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새로 복원한 건물이어서 그런지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문화시설로 이용되는 것 같았다.

강릉대도호부관아 정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을 보면 칠사당이라는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건물이 있다. 이름만 보면 신주를 모신 사당 같은 느낌이지만, 아전(지금의 지방 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일곱 가지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곳이라고 해서 칠사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강릉대도호부관아의 부속건물이다. 



새로 지어진 동헌의 뒤로 돌아가면 오래된 문이 하나 나오는데, 이 문을 임영관 삼문이라고도 하고 객사문이라고도 한다.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지만 화려한 모양의 나무들이 잘 짜맞추어져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수 백년동안 서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강릉대도호부는 규모가 꽤 큰 관아였지만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해 대부분 철거돼 옛 모습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칠사당과 삼문이 뿐이다. 임영관 건물들도 발굴 복원된지 겨우 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새 건물이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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