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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58]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서울 탑골공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8-04 11:54:47
  • 수정 2024-04-10 10: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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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탑골공원은 탑공원.탑동공원.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하며, 1991년 10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면적은 1만 5,720㎡이다.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가, 조선시대 전기(1464)에는 원각사(圓覺寺)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 건물이 모두 철거되면서 빈터만 남아 있다가, 1897년(광무 1) 영국인 고문 J.M.브라운이 설계해 공원으로 꾸며졌다.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로 더욱 유서깊은 탑골공원은 현재 시민의 휴식광장으로 공개돼 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보물).앙부일구 받침돌 등의 문화재와 1980년에 제작.건립한 3·1운동기념탑.3·1운동벽화.의암(義庵) 손병희 동상(孫秉熙銅像:1966년 건립).한용운(韓龍雲) 기념비(1967년 건립) 등이 있다.



서울시에서는 그 동안 공원의 북서쪽 둘레에 있던 파고다아케이드가 임대기간 만료로 철거됨에 따라 1983년 그 자리에 투시형 담장을 설치하고, 서문(西門)과 북문(北門) 등 사주문을 복원했고, 공원 부지도 확장.정비해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史蹟公園)으로 면모를 일신시켰다.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했다.


# 탑골공원 이름의 변천사...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고, 조선 전기(1464)에는 원각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다.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에는 사찰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백탑만이 남아 있었는데, ‘탑이 있는 절터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마을' 혹은 '탑골'이라고 불렀고 한자어로 ‘탑사동(塔寺洞)’이라 부르고 표기했다 한다.




3․1운동 때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파고다’라는 말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서 ‘신에 귀이 한다’는 뜻을 가진 ‘파가바티(bhagavati)’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 말이 포르투갈어로 사용돼 파고드(pagode)가 되었고, 다시 영어로 사용되어 파고다(pagoda)가 되었다가 한국어로 사용되어 쓰인 것이었다. 그래서 파고다는 ‘사찰의 탑’을 뜻하는 말인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고 보물 3호인 ‘원각사비’등 문화재가 많이 있다.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으로(史蹟公園)으로 면모를 바꾸고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됐다.


탑골공원은 문화, 예술, 역사, 휴양관광지로서 사적 제354호(1991년 10월 25일 지정)로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했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도 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돼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했다고 한다.




고종의 근대화 정책으로 철도와 탑골공원을 들 수 있는데, 1897년에 탑골공원이 설립되고, 1899년에 철도가 개통되므로 도심 속에 있는 공원인 탑골공원은 오늘날 지하철 1호선, 3호선, 5호선의 환승역으로 많은 사람들과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활기차다.


1919년에 3․1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이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탑골공원으로 개칭했는데, 평지이면서 교통이 편리한 이 공원은 시위나 모임의 장소로 많은 이용을 하는 장면이 자주 보였다. 


# 탑골공원팔각정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후기 팔각 형태의 누정. 정자. 시도유형문화재.



198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현재 공원 한복판에 위치해 있고 5단의 층단식 석축 기단 위에 마루를 깔지 않고 직접 기둥을 세운 구조로 되어 있다.


탑골공원은 고려시대에 흥복사(興福寺)란 절이 있었던 곳이고,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1467년(세조 13)에 원각사(圓覺寺)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연산군 때에는 절이 폐사되고 그곳에 궁중의 가무(歌舞)를 담당하던 장악원(掌樂院)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 후 주변의 민가에 화재가 발생해 줄곧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지금부터 100여년 전 고종 임금 당시에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있던 외국관리 브라운(Brown,J.M.)이 공원으로 꾸밀 때 이 정자도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를 기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건물로 남아 있다.


#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전기에 건립된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사적비. 보물.


1963년 보물로 지정됐, 전체 높이 4.9m, 비신 너비 1.3m로 1471년(성종 2)에 건립됐다. 원각사는 탑골공원(구 파고다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 본사로 세웠는데,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서(官署)로 사용했다. 세조가 간경도감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檜巖寺)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마당에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金守溫).성임(成任), 뒷면의 추기(追記)는 서거정(徐居正).정난종(鄭蘭宗)이 각각 짓고 썼다. 대리석제의 비는 마멸이 심해 전혀 알아볼 수 없는데,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려 있다.


반구형의 이수는 비신과 한 돌로 보주를 받든 형상의 쌍룡을 조각했다. 이수 아래쪽에는 ‘大圓覺寺之碑(대원각사지비)’라는 전액을 강희맹(姜希孟)의 글씨로 새겼다. 귀부는 둔중한 몸체로 일반적인 육각형 귀갑문 대신에 사다리꼴 평행 세선을 새겼고 연잎 모양의 비좌(碑座)와 물고기 비늘을 조각한 꼬리나 다리가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당비(唐碑)의 형식을 따른 복고적인 석비로, 이수부에 전액(篆額)이 새겨져 있고 조각이 화려하여 고전적인 석비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각사터에 있는 조선전기 대리석으로 건조한 10층 불탑. 국보.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높이 12m. 이 석탑은 전체를 대리석으로 건조했는데, 형태가 특수하고, 의장(意匠)이 풍부해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례를 다시 찾을 수 없는 최우수작이라 하겠다.


현재 10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고 그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는데, 상부의 3층 옥개석(屋蓋石)이 오랫동안 지상에 방치되었던 것을 1947년 원상태로 복원한 점으로 보아 상륜부재가 없어진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기단부는 3층으로 구성됐다. 건축기단으로서 면석과 갑석으로 이뤄졌고, 그 평면은 亞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층마다 각 면석에는 여러 가지 조각으로 화사하게 장식됐는데, 초층에는 각 면에 용(龍), 혹은 사자(獅子)와 모란(牡丹)·연화문(蓮華文)이 조식되고, 2층에는 각종의 인물.조수(鳥獸).초목.궁전을 표현했고, 3층에는 많은 나한과 선인들을 조각했다.


각 층의 갑석은 하면에 웅건한 당초문이 조식되고, 측면은 굽을 돌출시켜 갑석형(甲石形)을 이루었다. 그리고 상층기단 갑석 상단에는 난간을 장식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도록 해 주목되고 있다.



탑신부는 초층부터 3층까지 평면이 기단과 같이 亞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4층부터는 방형(方形)으로서 이 윗부분은 일반형 석탑의 탑신과 그 형태가 같다. 각 층의 옥신에는 하단부에 굄대를 높직하게 마련하고 측면에는 난간을 모각했다.


각 면 중앙에 12회(十二會)의 불(佛).보살(菩薩).천인상(天人像) 등을 조각했고, 네 귀퉁이에는 원형의 석주를 모각했다. 옥개석은 층마다 팔작지붕을 했고, 하면에 두공(枓栱)을 모각했는데, 지붕의 기왓골 등 모두 목조건축의 옥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특히, 2층 정면의 지붕은 전각지붕과도 같고, 더욱이 3층은 이중의 지붕모양으로 조성되어서 그 의장과 기교가 놀랍다. 이 석탑은 전면에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 석재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서 한층 더 우아한 맛이 있다.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전면에 장식된 불상의 조각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석탑의 소속 사원(寺院)이었던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창건됐다. 따라서 이 석탑도 사찰 창건 당시의 건조물로 추정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보다 앞서서 건립됐다고 하나, 이것은 이 석탑이 전대인 고려시대의 경천사십층석탑과 너무나 흡사한 데에서 오는 억측이다. 그 수려하고도 기교적인 면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탑파사상(塔婆史上) 손꼽히는 걸작품이라 하겠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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