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대한민국의 혼이 사는 곳 '서울 경교장'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8-26 03:14:58
  • 수정 2023-12-21 10:41:41

기사수정

경교장 전경[박광준 기자]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백범 김구(金九)가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사용했던 개인 사저로, 2005년 6월 13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경교장은 2001년 4월 6일 서울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가 2005년 6월 13일에 사적으로 승격됐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었고,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했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했다.


백범 김구 흉상건물은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다. 1층의 좌우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했고, 현관 2층부에는 6개의 붙임 원주를 사용해 5개의 들임 아치창을 냈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됐다. 또한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됐고 다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해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어왔다. 이후 서울시에서 소유는 그대로 두되 전체 공간을 복원하기로 합의해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했다. 이후 2013년 3월 2일부터 시민에게 개방됐다. 


경교장은 3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2층 응접실 겸 서재# 제1전시실에서는 '경교장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경교장은 1938년 일제강점기 광산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최창학에 의해 건립됐다. 원래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으로 불리었으나, 김구 선생은 근처에 있는 '경교:경구교의 약칭)'라는 이름을 따서 한국식으로 개명했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경교장은 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이면서, 또 김구 선생과 임정요인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귀빈식당1949년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서거한 후에는 중화민국대사관 사택, 월남대사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부터 병원시설로 이용됐다. 이 시기에 경교장은 병원으로 내.외부가 개조돼 원형이 변형됐다.


벽 내부도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 

원형대로 유지되고 있는 벽난로1960년부터 경교장을 보존하고 복원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됐으나, 199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문화재 지정을 위한 검토가 시작됐다. 마침내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고, 2005년 국가 사적으로 승격된 후, 2010년 실제 복원이 시작됐다. 당시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가구 배치 등 세밀한 부분까지 고려돼 재현되었기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김구선생 집무실, 이 곳에서 안두희 흉탄을 맞고 서거했다.# 제2전시실에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길'을 살펴볼 수 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러한 3.1정신을 이어 받아,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이후 인시정부는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 할 때까지 민족의 대표 기구로서 독립운동을 총괄 지휘했다.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귀국해 경교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과 북이 하나되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이 명시됐고, 국호(대한민국).연호(대한민국).국기(태극기).애국가도 그대로 계승됐다.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지만, 고난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낸 대한민국의 뿌리를 이 공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제3전시실은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전시했다. 1945년 11월, 조국에 돌아온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주 통일의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국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했다. 이 모든 활동은 경교장에서 이루어 졌다. 




김구 선생이 서거 시 입고 있던 옷

백범의 서거현장, 안두희 총탄 중 두 발이 창문을 관통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응접실에서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김구 선생의 통일에 대한 원대한 꿈은 비록 비극으로 끝나버렸지만, 그 열망과 간절함은 여전히 살아남아, 이 곳 전시실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전해지고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