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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지역의 지방 관아 '인천도호부관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9-12 05:03:09
  • 수정 2023-12-21 10: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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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관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역사여행(2)

아문은 관아의 정문으로 2층으로 된 누대에 위풍당당한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았다. 아문은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어 외삼문이라 하는데, 가운데 문은 주로 수령만이 출입하고 좌우 문은 일반인이 이용했다. 이 문에 이르면 수령 이하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려 걸어서 출입하는 것이 통례였고, 좌우에 건장한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 또한 대문의 공간 일부를 이용해 민원인들의 임시 대기실로 쓰기도 했다. 


측면에서 본 아문

[박광준 기자] 인천도호부는 조선 시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지역의 지방 관아 또는 행정 구역 이름이다. 


인천도호부는 고려 시대 수주(水州)의 한 속현이었던 소성현은 인주 이씨가 왕실의 외척이 되면서 비로소 인주(仁州)라는 이름을 얻게 됐고 고려 말에 이르면 경원부(慶源府)로 격상됐다. 


경원부는 1392년(공양왕 2)에 경기도를 확장하고 좌도와 우도로 도를 나눌 때, 양광도(楊廣道)에서 경기로 편입됐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우고 나서는 경원부는 1392년(태조 원년)에 인주가 됐다가 1413년(태종 13)에는 지방 제도 개편과 함께 군이나 현에 ‘주(州)’ 자가 들어 있는 고을은 주 자 대신 ‘산(山)’ 자나 ‘천(川)’ 자로 고치게 했기 때문에 인천군으로 개칭됐다. 여기서 처음으로 ‘인천(仁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이렇게 태종이 지방 제도를 개편한 것은 고려 시대에는 목사(牧使)가 수령인 고을이 주였으나, 지관(知官)이나 감무(監務)가 수령인 군.현에도 ‘주’ 자가 붙어 있는 고을이 많았기 때문에 태종이 주.부.군.현의 등급을 명확히 하고자 바꾸게 했다. 


동헌은 부사의 집무실로서 객사의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의 격식은 객사보다 한 단계 떨어졌으나 그 지역 최고 실력자의 지위에 합당하게끔 위엄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중앙은 마루로 된 대청으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이 여기서 행해졌고, 좌우의 온돌방은 숙식공간이라기 보다는 사무공간이나 응접공간이었다. 수령의 가족이 머무는 내아는 따로 배치됐다. 


충의비는 조선왕조개국(1392년)으로부터 한일하병(1910년)까지 인천도호부사를 지낸 355인의 성명을 새기 것으로 이는 조선왕조실록과 1899년 발간된 인천부읍지 등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유교정치 이념에서 충과 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신하는 임금에게 풍성을, 임금은 신하와의 바른 도리인 의를 실첨함으로서 이를 통해 민본 정치를 구현하려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9권 경기 인천도호부에는 인천도호부의 건치 연혁에 대해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이다. 또는 미추홀(彌趨忽)이라 한다. 신라경덕왕(景德王)이 소성(邵城)으로 고치어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수주(樹州)에 붙였고, 숙종(肅宗) 때에 인예 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의 본관이므로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고, 인종(仁宗)이 또 순덕 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본관이므로 지인주사(知人州事)로 고치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경원부(慶源府)로 승격하였다. 왕이 처음에 즉위하여 칠대 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승격시키고, 또 고을 호장(戶長)에게 붉은 가죽띠를 주었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에 다시 인주(仁州)로 만들었고,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예에 의하여 군으로 만들었고, 세조(世祖) 6년에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외가 고을이므로 승격하여 도호부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보다는 격이 높았고 그런 만큼 관아 시설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객사는 신성한 건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설계되었는데, 가운데 채가 좌우 채보다 한단 높은 솟을대문 형식을 독특한 지붕이다. 전패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채가 전청이며, 부사가 정기적으로 예를 올리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었다. 좌우의 익사는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접대와 숙소로 이용됐다.


망월의식/외직에 근무하는 관원이 궁궐에 나아가 임금을 직접 뵙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향해 행하는 의식이다. 객사는 지방관이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기 때문에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전청의 전패와 궐패를 향하여 절을 올리는 삭망례를 거행했다. 또 임금이나 왕비의 탄신일을 비롯해 정월초할,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의 명절에도 객사 앞뜰에서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의식을 행했다.  인천군은 1460년(세조 6)에 이르러 인천도호부로 승격됐다. 인천군이 인천도호부로 승격된 것에 대해 ‘인천광역시사’에서는 ‘세조 6년(1460)에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세조의 어머니인 소헌 왕후 심씨의 외향이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건치 연혁 조(建治沿革條)의 내용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인천광역시사’ 축쇄본에서는 도호부로 승격된 것이 세조의 비(妃)인 정희 왕후 윤씨의 외향이었기 때문이라고 수정하고 있다.또한 ‘인천광역시사’에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강희맹의 ‘승호기’를 인용해서 인천의 명문가인 문씨의 딸이 소헌 왕후의 아버지인 심온(沈溫)을 낳았다 해, 인천이 소헌 왕후의 진외가(陳外家)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왕비의 진외가라 해 군현을 승격시킨 예는 찾을 수 없고, 강희맹의 ‘승호기’ 역시 소헌 왕후와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사실을 연결시키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오히려 인천이 왕비를 배출한 고장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으며 인주 이씨의 사위인 윤번이 지금의 왕비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천군이 인천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세조의 비인 정희 왕후 윤씨의 외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반면에 소헌 왕후와 관련된 기록은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5년 6월 14일자에 나오는데 거기에는 청송군을 승격시켜 도호부로 삼는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세조 5년에 소헌 왕후의 내향이라 해서 청송군을 도호부로 승격시킨 기록을 인천의 도호부 승격으로 잘못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공수는 객사의 부속건물로 부엌.곳간.온돌방 등으로 구성돼 있고, 기능으로는 객사를 관리하는 인원과 중앙 사신을 수행한 수행 인력들이 유숙하고, 객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들 업무를 주관하던 곳이 공수청이다. 도호부로 승격됐던 인천은 1688년(숙종 14)에 승려 여환(呂還) 등이 모반을 꾀했다 해 현으로 강등됐다가 1697년(숙종 23)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고, 1812년(순조 12) 진채(振采)의 역모 사건으로 현으로 강등됐고,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에 따라 인천부가 설치되는 등의 변화를 겪게 된다.


삼문은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에 출입하기 위해 설치된 문이다. 이들 문을 아문인 외삼문과 구별해 내삼문이라 했는데, 이 문 역시 세 개로 되어있어 삼문이라 하는데 가운데 부분이 솟아있어 솟을삼문이라 한다. 

인천도호부관아 밖에서 바라본 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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