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62] 대한제국기 천자가 하늘에 제를 올렸던 제단 '환구단'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0-01 11:18:02
  • 수정 2024-04-10 10:55:48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환구단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천자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으로, 일명 환단(圜壇)이라고도 한다. 1967년 7월 15일에 사적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철도호텔을 건립하면서 환구단이 철거되고 현재는 신위를 모셨던 황궁우만 남아있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둥근 단으로 된 제천단(祭天壇)이다.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해 하늘에 제를 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 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다.


국왕이 정결한 곳에 제천단을 쌓고 기원과 감사의 제를 드리는 것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일찍부터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983년(고려, 성종 2) 정월에 왕이 환구단에 풍년기원제(豊年祈願祭)를 드렸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으로 보아, 이미 이전부터 이러한 의식이 행했다고 추측된다.


원구단 정문(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대한제국(1897-1910) 초기 원구단 시설을 건설하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원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당시 황궁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맞은편 남별궁터에 세웠다. 원구단의 전체 시설은 제를 올리는 원구단과 천신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 그리고 그 주변 시설로 어재실, 향대청, 석고각 등을 갖추었으나 현재 황궁우와 석고각 안에 있던 돌북만 남이 있다. 정문은 원래 황궁우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변에 있었는데, 1960년대말 철거된 뒤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했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던 문이 원래 원구단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문의 이전 복원을 논의했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 좀 더 많은 시민이 원구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쉽게 접근하도록 서울광장, 덕수궁과 마주보는 원구단 시민광장으로 자리를 정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넓고 양측 칸을 좁게 조정했다. 기둥 위에는 출목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를 사용하고, 대한제국 황실 문장이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제천의례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됐다. “1398년(태조 7) 4월, 가뭄이 심할 때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圓壇)과 여러 용추(龍湫 : 폭포수 아래의 깊은 웅덩이)에 비를 빌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환단의 위치를 보면, 한강 서동(西洞) 또는 남교(南郊)로 되어 지금의 한남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또한 환구단의 구조는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단 주위를 6장(丈)으로 하고 단 위에 천황대제(天皇大帝)와 오방오제(五方五帝)의 신위를 봉안했으나, 단상이 좁아 1411년(태종 11)에 확장해 단 주위를 7장으로 단으로 오르는 12층계를 만들고 단 아래에는 3개의 토담〔土壝〕을 만들어 주위 담에는 4개의 문을 냈다. 그리고 단 남쪽에는 다시 높이 1장 2척 창호방(窓戶方)의 요단(燎壇)을 쌓았고 신주(神廚)와 재궁(齋宮)을 지어 면모를 새롭게 했다.


석고/석고는 광무 6년(1902)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세운 조형물이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조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서 당시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세조 때에 환구단을 쌓게 했다는 기록이 보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환구단의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諸侯國)의 왕으로서 천제(天祭)를 지냄이 합당하지 않다는 논의 때문으로, 이로 인해 이후 여러 차례 제천단을 폐한 일이 있었다.


그 뒤 고종이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천자가 되었기에 완전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게 됐다. 환구단은 1897년(광무 1) 우리나라도 천신(天神)에게 제를 드려야 한다는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따라 영선사(營繕史) 이근명(李根命)이 지관(地官)을 데리고 지금의 소공동 해좌사향(亥坐巳向)에다 길지(吉地)를 정하고 제단을 쌓게 했다. 제단이 조성된 이후에 고종은 이곳 환구에서 천지에 제를 드리고 황제위(皇帝位)에 오르게 됐다.



이때에 조성된 환구단의 제도를 보면,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位)는 제1층 북동쪽에서 남향해 있고 황지기(皇地祇)의 위는 북서쪽에서 남향했다.


제2층 동쪽에는 대명(大明), 서쪽에는 야명(夜明)의 위가 봉안됐고,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嶽).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위와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 : 다섯 鎭山).사독(四瀆 : 나라에서 위하던 네 江).대천(大川).사토(司土)의 위가 모셔졌다.





그리고 제를 올릴 때 영신궁가(迎神宮架)에는 중화(中和)의 악, 진찬궁가(進饌宮架)에는 응화(凝和)의 악 등, 여러 주악이 의식에 따라 연주됐다.


그 뒤 1899년(광무 3)환구의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추존해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삼고, 환구 황지기 위의 동남에 배천(配天)했다.


환구단은 조선철도호텔이 건립되기 전 1913년 헐렸다. 지금은 조선호텔 부지 내 위치하고 있다. 환구단의 정문은 현재의 조선호텔 건설로 철거됐으나 2009년 서울광장방향에 복원됐다.


환구단 난간석 석물 유적/환구단 난간석 석물은 고종이 천지에 고유제를 지낸 후, 1897년 10월 12일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을 구성했던 3개 층의 원형 난간석 중 한부분이다. 이 석재는 1913-1914년 조선경성호텔을 지으면서 환구단을 헐어서 남게 된 석물이다. 그동안 황궁우의 정문이자 황구단과 황궁우를 잇는 문에 사용하는, 전벽돌로 지은 삼문(이하 전축삼문)의 양쪽 난간 석재로 사용했다. 2019년 전축삼문 주변의 직전 담장을 복원하면서 다시 헐어서 현 위치에 보관하고 있다. 고종 황제가 대한민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를 지낸 환구단의 역사적 실체라 할 수 있다.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의 황궁우는 지금도 남아 있다. 기단 위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1.2층은 통층(通層)인데, 중앙에 태조의 신위가 있다. 3층은 각 면에 3개의 창을 냈다.


건물의 양식은 익공계(翼工系)인데, 청나라 영향을 받은 장식이 많다. 황궁우 옆에는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한 듯 3개의 석고(石鼓)가 있는데, 몸통에 조각된 용문(龍文)이 화려하다.


제천단의 또 한 예로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자리잡은 참성단(塹星壇)을 들 수 있다. 이는 단군이 제천을 위해 쌓았다고 전해온다. 밑부분은 둥글며(지름 4.5m), 윗부분은 정방형(한 변이 2m)으로 전체 높이는 6m이고 동서에 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에 중수했고 매년 음력 1월과 9월에 제사를 올렸졌고, 요즈음에는 전국체육대회의 성화가 이곳에서 채화된다./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