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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64] 한양 도성 4대문의 하나로 도성 출입에 쓰인 성문 '숭례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0-07 18:36:47
  • 수정 2024-04-10 10: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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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숭례문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도성의 남쪽 정문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됐다.


숭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됐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고,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돼 있다.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됐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화재 이후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했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됐다. 




# 조선시대의 숭례문


숭례문은 한양 도성 4대문의 하나로 도성 출입에 스인 성문인 동시에,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나라의 관문 구실을 했다. 또 중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군사를 출병시킬 때 관료들이 숭례문 밖에서 전송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조(1724-1776)가 숭례문 문루에서 죄인을 다스렸다거나, 정조(1776-1800)가 수원 현륭원에 행차할 때 숭례문 안팎에 척후와 복병을 배치하였다거나, 순조(1800-1833)가 능에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신주를 숭례문 밖에서 맞이했다거나 하는 기록 등을 통해 숭례문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문과 주변에 군사를 배치해 도성 내부의 왕궁과 백성을 파수한 것은 물론 통금 시간(2경-5경)에는 성문을 닫아 출입을 통제했다. 성문을 여닫는 신호는 종이나 북을 쳐서 알렸는데 2경에 성문을 닫는 제도를 인정, 5경은 성문을 여는 제도를 파루라 했다. 숭례문에 종을 달았다는 기록은 1425년(세종 7) 4월에 처음 보이고, 이후 종을 쳐서 인정과 파루를 알렸다는 기록이 1536년(중종 31), 1594년(선조 27), 1598년(선조 31) 세 차례 보인다. 





일상적으로 성문을 여닫는 일 이외에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내야 할 경우에는 불의 방위인 남쪽의 숭례문을 닫고 물의 방위인 북쪽의 숙정문(숙청문)을 열어 시장을 옮기고 북을 치지 못하게 하는 등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기를 기원했다. 


비가 내리면 다시 숭례문을 열고 옮긴 시장을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북을 치도록 하는 등 원래 상태로 되돌렸는데, 1528년(중종 23) 가을 가뭄에는 봄 여름과 달리 기우제만을 지냈다. 


# 숭례문의 건축


숭례문은 화강암을 높이 쌓아 만든 홍예문(무지개 모양 문)을 출입구로 삼아 도성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게 했고, 그 위쪽에 목조 건물(문루)을 세웠다. 





2층 문루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동서 양쪽에 돌계단을 설치했고, 문루 둘레에 전통 벽돌 담장을 두르고 돌계단과 만나는 곳에 작은 문을 내어 문루 출입구로 삼았다. 문루 하층 내부 바닥가운데 1칸은 마루를 갈고 나머지는 모두 흙바닥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층마다 모두 겹처마로 만들어졌고, 추녀마루에는 잡상, 용마루 양쪽 끝에는 취두라 불리는 장식용 기와를 각각 세워 지붕에 위엄을 더했다. 


# 근대의 숭례문


1899년 숭례문의 홍예 아래로 전차가 통과하게 되면서 도선 안팎의 출입을 통제하던 고유의 기능을 비롯해 군사적, 의례적, 사상적 기능은 사라지게 됐다. 그 결과 숭례문을 비롯한 도성의 4대문은 도로의 확장에 따른 성곽의 철거, 도시의 확장에 따른 도성의 해체과정 등을 겨으면서 축대와 문루로만 이뤄진 성문으로 남게 됐다.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이후인 1910년에는 숭례문 주변에 원형석축이 만들어지고 그 주위로 전찻길과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숭례문은 물산공진회나 박람회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홍예 내부로의 출입과 접근마저 금지돼 숭례문은 주변 도로로 둘러싸여진 섬처럼 고립되게 됐다. 


# 현대의 숭례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숭례문 석축과 문루가 총탄과 포탄에 의해 훼손돼 1953년에 긴급.수리했고,  1961-1963년에 다시 석축 일부와 문루 전체를 수리함으로써 전재으로 훼손된 부분이 거의 복구됐다. 서울시가 숭례문 주변을 공간으로 조성한 뒤, 2006년 3월에 숭례문을 시민에게 개방했다. 



창건 후 600여 년 동안 수많은 전쟁과 고난 속에서도 건재했던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 발생한 방화로 목조건물인 문루 일부분이 불에 탔다. 잔해를 조사한 결과 문루의 2층 90%와 1층 10% 정도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기존에 작성된 정밀실측 도면과 사진을 활용하면 문루를 복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됐다. 그 후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약 2년간 정밀 실측조사와 구조 안전성 검토를 마쳤고, 2010년 2월 복구공사에 착공, 2013년 5월 4일 공사를 오나료한 다음 일반에게 공개됐다. 


화재 복구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을 복구공사에 반영해 그동안의 수리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았다. 1층 지부 추녀마루와 잡상을 8개에서 7개로 바로 잡고, 용마루 길이를 15.7m에서 16.6m로 고쳤는가 하면, 동쪽계단 폭을 2.9m에서 5m로 늘리고 문루1층 중앙칸에 설치된 마루를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고쳤다. 또한 1907-1909년 사이에 헐려나간 성문 좌우 성곽을 동쪽 53m, 서쪽 16m까지 복원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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