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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33] 덕수궁의 별전으로 을사녹약을 체결한 장소, 덕수궁 '중명전'
  • 이승준
  • 등록 2023-10-08 03:32:28
  • 수정 2024-04-15 17: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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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중명전은 덕수궁의 별전(別殿)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이다. 즉, 망국의 출발점인 비극의 장소이다.


'중명(重眀)' 뜻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또는 '거듭하여 밝다'이다.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망국을 알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 역사와는 매우 어긋난 모순적인 이름이다. 


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 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 자로 썼다. 얼핏 보면 잘 구분이 안가지만 '明'에서 '날 일(日)'이 아닌 '눈 목(目)'이 들어가있다. '明'과 모양만 다른 같은 글자이고, '밝게 볼 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일제가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을 대신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일본(日本)을 싫어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日'이 들어간 '明'대신 '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던 한자이다. 현재 현판은 2010년 8월에 복원한 것이다.





# 조선.대한제국 시기


원래 덕수궁 궁역(宮域)이 아니었다. 1884년(고종 21년) 11월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마련한 곳으로, 이 일대는 알렌의 집 말고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1886년(고종 23년)부터는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거처로 변모했고 1887년(고종 24년)에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가 여성 교육기관인 정동여학당(현재의 정신여자고등학교)을 세웠다.


정동여학당은 1895년(고종 32년)에 연지동으로 옮겨갔고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부지를 매입해 덕수궁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을 지었다. 이 때 미국인 건축기사 다이가 설계감리를 했다고 한다. 정확한 완공일자는 모르나 1898년(광무 2년) 1월 말에 준공을 앞두고 있었다는 주한일본공사관의 기록을 보아 그 무렵에 완공한 듯 하다.




수옥헌 건립 이유를 고종의 미국 의존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친러파와 러시아 외교관들이 도리어 고종을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전임연구원 장경호에 의하면, 러시아에 부담을 느낀 고종은 덕수궁 환궁 전후로 해서 더욱 미국 의존도를 높였고 여러 번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할 의도를 비공식적으로 내비쳤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그러자 고종이 차선책으로 미국공사관 바로 옆에 임시 피난처 개념으로 왕립도서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경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전략) 특히 황제는 우리 공사관으로 오고 싶어합니다. 저는 황제가 다른 열강들을 불신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보호처를 말해줄 수 없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 언급했습니다. (중략) 황제는 지금 그가 여기로 영구히 파천해 온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소위 "왕립도서관"이라는 것을 우리 공사관 옆문에 설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미국인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제가 그린 "왕립도서관"을 참조하십시오. 저는 황제가 위험이 닥치면 이 도서관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략)


어쨌든 수옥헌은 완공 이후 도서관으로서 수많은 황실의 서책들과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됐다. 그 외에도 독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친왕 접견 등 외국의 주요인사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1901년(광무 5년) 11월 16일에 수옥헌 일곽의 건물 한 채에서 불이 났다. 불은 삽시간에 수옥헌으로 번져 수옥헌은 소실되고 말았다. 호머 헐버트가 발간한 '더 코리아 리뷰' - 1901년 11월 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이달(11월) 16일 새벽 2시경, 미국공사관 바로 서쪽에 붙어 있는 제실도서관(수옥헌) 후면의 외곽 건물 한 채에서 이유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만약 거기에 어떠한 응급조치가 있었다면, 본 건물로 번지기 전에 불길은 쉽게 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소는 방치된 듯 했고, 물동이 서 너개가 없었던 탓에 정부는 매우 귀중한 건물을 잃고 말았다. 도서관에는 숱한 귀한 서책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피아노 한 대를 포함한 가구 일체와 함께 모두 불타 사라졌다. 호머 헐버트, '더 코리아 리뷰' - 1901년 11월 호



화재 이후 러시아 제국 국적의 우크라이나인 건축기사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Афанасій Іванович Середін-Сабатін)의 설계 감리 하에 재건했다. 이 때 지금의 2층 벽돌 건물로 바꾸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덕수궁 본궁에서 화재가 발생해 고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편전 겸 침전으로 활용했다. 이후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할 때까지의 약 3년 동안 사실상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황궁 기능을 담당했다.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이 을사조약을 여기에서 강제체결했다.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꾼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명전 이름이 공식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1906년(광무 10년) 11월(음력 9월) 이후인 것을 보아 그 무렵에 바꾼 듯 하다.





# 일제강점기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덕수궁 궁역 축소화에 따라 덕수궁 궁역에서 분리당했다. 경성구락부가 인수하여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활용했다. 1925년에는 조리실의 화재사고로 외벽을 제외하고 전부 불탔으며 이후 재건했다.


# 광복 이후 ~ 현재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국가가 소유 및 관리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과 공산당이 사용했다가 수복 이후 다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소유했다.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에게 중명전 사용권을 이양해 영친왕 부부가 소유했다가 영친왕이 사망한 이후 다시 민간에게 위탁, 매각했다. 그러면서 점차 역사성을 상실하며 일반 점포로 전락했다.


만희당지/ 이 곳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했던 만희당 터이다. 건립년도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중명전 영역으로 거쳐를 옮기면서 만희당을 침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07년 고종이 함녕전으로 돌아간 이후에 헐린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중명전은 서울 주재 외국인들을 위한 클럽으로 사용됐는데, 이때 만회당이 있던 자리에 수영장을 만들어 사용했다. 2009년 발굴조사 시 수영장으로 썼던 흔적과 만희당의 기둥자리가확인됐다. 1983년에 서울특별시청에서 시장령에 따라 중명전을 인수해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했고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했지만, 앞뜰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건물 지하는 폐건물마냥 방치된 모습이 2006년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 74434'에서 방영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소유했고 2007년 2월에 사적 124호 지정으로 덕수궁 궁역으로 재편입했다. 이후 고증을 통해 대한제국 시기의 모습대로 복원해 2010년 8월에 일반에 개방했다. 2016년 8월부터 오래 된 시설을 보수하고 20세기 초 권역의 평면도를 검토해 당시 지반 높이를 반영시키고 석축과 계단을 복원해 11개월의 공사 끝에 2017년 7월에 민간에 재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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