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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유형문화재 9] '교화를 복돋운다'는 뜻으로,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10-08 05:13:16
  • 수정 2023-10-12 14: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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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문화재 제19호


[박광준 기자] 경희궁 흥화문은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으로,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경희궁의 정문(正門)으로, 전각의 명칭인 '흥화(興化)'는 '교화를 북돋운다'라는 뜻이다. 원래는 경희궁의 동남쪽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희궁의 남쪽, 장충동 등으로 이전됐고 1998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1617년~1623년(광해군 9~15) 경희궁을 창건할 당시 지어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경희궁지(慶熙宮志)'에 의하면 경희궁의 정문(正門)은 동쪽에 흥화문(興化門), 흥화문의 왼쪽과 오른쪽에 흥원문(興元門)과 개양문(開陽門), 경희궁의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 총 5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흥례문만이 남아있다. 



흥화문의 원래 위치는 경희궁의 동남쪽 오늘날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도로공사로 경희궁의 남쪽으로 이전됐고, 1932년에는 장충동으로 옮겨져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찰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됐다. 해방 이후 박문사 자리에 국빈 전용 숙소인 영빈관(迎賓館)이 들어서면서 흥례문은 영빈관의 정문으로 쓰였고, 1973년 영빈관 자리에 신라호텔이 개관해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됐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에 따라 흥화문을 본래의 자리로 이전하려 했으나, 그 자리에 구세군회관이 들어와 있어 원래의 위치에서 230m 떨어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됐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축물로,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참고로, 경희궁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있는 궁궐터로, 1980년 9월 16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경희궁지는 면적 10만 1222㎡로, 원래 조선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잠저(潛邸)가 있던 곳이다. 1616년(광해군 8) 건립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했으나,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이라고 개칭했다.


경희궁에 임금이 거처하기 시작한 것은 인조 때로서 이괄의 난으로 거처하던 창경궁이 불에 타자 1624년 2월부터 경희궁에 거처하게 됐다. 이때부터 경희궁은 280여 년 동안 여러 왕들의 거처로 창덕궁과 함께 그 웅장함을 지켜오다가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많은 전각들이 훼철돼 경복궁의 자재로 사용됐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의 건물이 함께 있었으나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지고 나머지 건물들은 1910년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8.15광복 후에도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가 이 학교의 이전에 따라 현대건설이 부지를 사들여 사용했고, 이를 다시 서울특별시가 인수해 1988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2001년 현재 궁궐터는 원래의 모습을 찾지 못했지만, 숭정전과 회랑, 흥화문은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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