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서원 202] 송나라 주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임장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19 07:13:47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임장서원은 1700년(숙종 26) 무오사화 이후 이곳에 정착한 임계중(任繼重), 김모재, 김사재 등과 향내 유림의 공의로 주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주자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함께 사액을 받았고, 1716년(숙종 42)에 ‘임장’이라 사액해 ‘임장서원’으로 개칭됐다. 1801년(순조 1)에 김성락 등 향내 유사들의 상소로 송시열을 배향하는 것이 허용되어 이 서원에는 주자, 송시열의 영정을 보안하고 유생들이 수강하는 서원이 되었다.


임장서원이 있는 무이촌(武夷村)은 차탄천을 등지고 앞으로 아미천이 흐르고, 산세는 양금령이 구곡을 이루고 있어 중국의 주자가 성장한 고부현 무이촌과 흡사하다 하여 주자를 흠모하고 더불어 성현의 정신을 탐구했다.


그 후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됐다가 뒤에 복원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다가 1996년 2월 ‘임장서원복원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서원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매년 9월 보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주벽-주자(朱子, 1130~1200)


사진/연천군자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婺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했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瑳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해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했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정씨유서(程氏遺書)≫≪논맹정의(論孟精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서명해의(西銘解義)≫≪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통서해(通書解)≫≪정씨외서(程氏外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연천군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시집전(詩集傳)≫≪주역본의(周易本義)≫≪역학계몽(易學啓蒙)≫≪효경간오(孝經刊誤)≫≪소학서(小學書)≫≪대학장구(大學章句)≫≪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맹자요로(孟子要路)≫≪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한문고이(韓文考異)≫≪서전(書傳)≫≪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 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사진/연천군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冑)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사진/연천군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심경석의(心經釋義)≫≪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1995년부터 1998년 사이에 재건된 것이다. 서원은 남향하여 삼문(三門)이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우형식을 갖춘 목조 맞배지붕의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중앙에 주희의 위패와 우측에 임계중, 좌측에 송시열의 위패를 모셨다. 재건과정에서 기존의 서원 유지는 완전히 파괴됐고 현재의 임장서원이 서있는 남쪽 경작지에 원래 서원의 구조물로 여겨지는 석재와 기와 편 등이 산재되어 있다. 서원 재건 후 지역 유림들의 발의로 만절당 임계중(晩節堂 任繼重)이 추배되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