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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69] 덕수궁에 있었던 육교 '운교'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1-27 13:52:37
  • 수정 2024-04-10 1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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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덕수궁에 있었던 육교로, ‘운교(雲橋)’ 또는 ‘홍교(虹橋)’로 불렸다. ‘운교’는 ‘구름(雲) 다리(橋)’란 뜻이고, ‘홍교’는 ‘무지개(虹) 다리(橋)’란 뜻으로, 홍예(虹蜺)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2개였다. 하나는 서북쪽에 위치했고 경희궁을 잇는 다리였고, 다른 하나는 서남쪽에 의정부 청사를 잇는 다리였다. 이렇게 궁궐 안팎을 연결하는 육교를 놓은 것은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이었다.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자료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1898년(광무 2년) 9월 7일 자 '매일신문' 기사에 건립 계획이 나와있다.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 상림원 뒤부터 서궐(경희궁) 개양문까지 구름다리를 놓고 흥화문 앞부터 홍릉까지 철로를 놓는다 하더라


궐외각사와 연결했던 운교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그러나 1902년(광무 6년) 8월 23일 자 '황성신문' 기사에는 공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또한 개화기에 한국에 있었던 호머 헐버트 박사가 쓴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도 운교 건설 소문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아 1898년(광무 2년)에는 계획만 짰고, 공사는 이 무렵부터 진행한 듯 하다. 


경운궁 안에서 서궐까지 어로를 새로 지으려는데, 홍교를 새로 설치해서 그 아래로 전차가 지나다니게 하고 오늘부터 짓기 시작한다더라. 그러면 언제 완성됐을까. '더 코리아 리뷰'에 의하면, 같은 해 10월에 운교를 이미 다 지었다고 한다. 이를 보아 공사 기간은 대략 1-2개월 정도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운교 흔적 폴란드 출신 러시아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한 말에 의하면, 한국인 신문균과 규마(kiuma)가 건축했다고 한다. 그는 운교에 대해 한국 건축 중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평하면서도,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 세웠고, 나라의 회계장부에 공공이익작업에 쓴 돈이라 비밀스럽게 적은 액수가 어디에 쓰였는지 보여주는 사례라면서 비판했다.


이 운교를 왜 지었는지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지만, 몇몇 기록을 통해 추론해보면, 대한제국 정부에서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대규모 칭경예식을 계획했고 그 행사의 일환으로 군대 사열식인 관병식을 거행하려했는데 그 관병식을 경희궁에서 열 예정이었기 때문에,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편하게 드나들기 위해 지은 듯하다. 당시 경희궁은 건물 몇 채 있는 것 빼고는 허허벌판이었고 그래서 관병식을 개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덕수궁 길의 현재모습 

그러나 사정 상 칭경예식을 여러 번 미루다 결국 영원히 치르지 못했다. 그래도 운교는 남았고, 고종이 간간히 경희궁 황학정에 활쏘러 갈 때 이용했다.


현재는 없으며 언제 철거했는지 확실하게 모른다. 일본인 오다 쇼고(小田 省吾)는 책 '덕수궁사'에서 1908년(융희 2년)에 헐었다고 적었는데,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같은 해 8월까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그 이후에 없앤 듯 하다.


한편, 1902년(광무 6년) 11월 12일 자 '황성신문' 기사에 의하면 다리가 러시아 공사관 경내를 침범했다해 공사관 측에서 다리 한가운데에 철책을 세우고 통행을 막은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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