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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324] 미래도시 용산, ‘용산역사박물관(4)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5-21 08:45:39
  • 수정 2024-05-23 0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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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도의 교통의 중심이 된 용산-용산 청과물 시장-제과사업의 격전지

[우성훈 기자] 19세기 후반까지 경강 뱃길 따라 수상 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던 용산은 러일전쟁과 한일병합조약으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 전환했다. 1900년한강철교가 준공되어 철도가 한강 이북으로 연장됐다. 



1904년 일본은 용산은 용산의 군용 부지 가운데 51만 평을 철도 용지로 전환하여 용산역을 중심으로 철도국, 철도공장, 철도관사, 철도병원, 철도종사원양성소 등 각종 철도시설을 세웠다. 그리고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등 주요 간선 철도가 용산역을 통과하도록 설계됐다. 


조선총독부 철도국 '개조항' 현판

해방 이후에도 용산 역은 여객과 화물 수송의 중심지로 가능하여 용산역 주변으로 다양한 유통사업이 발달하는 바탕이 됐다. 1976년 농수산물 유통및 가격 안정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양재동과 가락동에 공영 도매시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전국 최대 규모의 양곡 공판장과 청과물 도매시장이 용산에 있었다. 


# 매일 아침 첫 기적을 울리던 용산역


기차 화물표/서울 용산구 한ㅁ강로 3가 -2(현 용산전자상가 지역, 구 용산청과뭉시장)내에 소재했던 한성청과의 미사용 기차 화물표로 총 46매가 하나로 묶여 있다. 화물표에는 '항ㄴ성청과' '유농'과 전화번호, 품명, 수량 등이 인쇄되어 있다. 1908년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선과 서울-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용산역으로 연결되면서 부산에서 신의주 사이 직행이 가능해졌다. 이에 남북 국토를  종단하는 급행열차가 개통됐다. 부산-신의주 급행열차는 순종황제의 연호를 따 융희호라고 했다. 





1914년에는 용산역에서 원산역을 오가는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시발역으로서 용산역의 역활이 더욱 강화됐다. 1925년 경성역이 준공되면서 철도 교통의 중심이 경성역으로 옮겨갔지만 이후에도 용산역을 통과하는 철도와 역사 주변의 철도 관련 시설은 대부분 유지됐다. 2004년 용산역은 한국고속철도(KTX)호남.전라선의 시발역으로 지정 되어 다시 한번 부흥의 계기를 맞게 됐다. 


# 대우는 차별, 기술은 독점 


1920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체 철도 종사원 중 조선인이 45.5%를 차지했으나, 대부분 현장에서 일하는 말단직이었다. 일본은 조선일을 차별 대우하며 철도 관련 고급 기술을 독점했다. 일본이 운영한 국유철도 종사원 양성기관인 경성철도 학교의 조선인 졸업생 비율은 10.7%에 불과했고, 용산 철도공장이 당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공장으로 기관차와 객.화차의 수리 및 생산을 담당했는데도 해방 이후 기관차를 생산할 수 있는 한국인 기술자는 없었다. 


# 포격으로 파괴된 철도기지


폭격으로 운행을 멈춘 열차들/사진-국가기록원한국전쟁의 발발로 철도기지 용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9년 10월 철도  수송량이 증가하면서 용산역사 개축이 논의됐지만 전쟁으로 공사는 무산됐고, 전쟁 중에는 포격의 대상이 됐다. 1950년 6월 28일 한강철교가 폭파됐고, 7월 16일에는 B-29기의 폭격으로 철도 조차장과 공작창이 파괴됐다. 용산 대폭격으로 회자되는 B-29기의 폭격을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아군의 전략적 조치였다. 


용산역 공작창 및 서울운전사무소 차고가 파괴된 모습/사진-국가기록원 용산공작주신회사 영등포공장에서 우리 기술로 제작한 첫 증기관차 해방자호가 1945년 12월 27일 사운전에 성공하여 1946년 5월 26일조선해방자호라는 이름으로 서울-부산간 운행을 시작했는데, 이 특급열차 또한 전쟁 중에 소실됐다. 


# 식민지 유통망 구축의 기반이 된 철도


대륙 진출을 목표로 동북아 철도망을 계획한 일본에게 한국은 중요한 거점이었다. 일본은 한반도 전역에 간선철도를 건설했다. 그 중심은 단연 서울이었다. 경부선(1905), 경의선(1906), 호남선(1914), 경원선(1914) *를  이르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개통식을 시행한 일본인들 모습(1899)

부산, 목포, 원산 등의 주요 종착역은 일본의 해로로 연결됐다. 이는 한국의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하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192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가 삼림과 광물자원의 수송에 관심을 보이면서 철도는 체계적인 자원 수탈의 수단이 됐다. 전라선(1936), 혜산선(1937), 만포선(1939)도 듀통망 확보 차원에서 증설됐다.


# 용산 청과물 시장


용산 청과물 시장 내김장 시장 모습(1977)

용산 청과물 시장은 한강로 일대에 농업 협동조합공판장, 나진시장(1971), 서울청과(1975), 태영시장(1976)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형성됐고, 1985년 가락동에 농수산물이 전문적으로 거래되는 도매시장법인이 설립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청과물시장이었다.

 

전자상가로 바뀌기 전의 용산 청과물 시장(1984)생산지에서 출하된 과일과 채소가 새벽마다 수백 대의 트럭에 실려 용산으로 운반되었다. 용산에 도착한 청과들은 경매를 통해 중.소매상에게 판매되었다. 청과물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전한  이후 그 자리에는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왔다. 


# 제과산업의 격전지


용산은 1930년대 우리나라 제과 산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제과 회사는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했는데, 해방 후 한국인들이 인수했다. 1945년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인이 나카오카제과를 인수해 해태제과를 창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1934년 창립된 풍국제과는 1956년 이양구가 인수해 동양제과(현 오리온제과)로 전환했다. 


영화 '오발탄'(1961)에 등장하는 오리온제과 본사 모습한국인이 창립한 영일당제과(현 크라운제과)와 롯데제과도 전례를 따라 용산에 정착했다. 이후 해태제과가 크라운제과에 흡수되어 용산에서 크라운해태제과, 오리온제과, 롯데제과의 3대 제과회사가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되었고, 이후 롯데제과는 영등포로 이전 했으나 크라운해태제과와 오리온제과는 여전히 용산에 남아 있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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