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훈 기자] # 왕실 묘원에서 공원으로 격하된 효창공원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를 안장하면서 효창원이라 하여 왕실 묘원을 조성했다. 이후 문효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와 그의 딸 영온옹주도 이곳에 잡들었다. 100여 년간 소나무와 밤나무 숲이 우거진 한적하고 아름다운 왕실 묘원으로 유지되었던 효창원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군사령부가 효창원 구역에 속한 만리창에 주둔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효창원의 숲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들었고, 승전 기념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4년 10월 왕실 묘역을 서삼릉으로 강제 이전하고 그 자리를 공원화했다.
# 이주민에서 원주민으로
둔지미 사람들은 기존 보광동 주민들이 살던 마을 위쪽에 자리를 잡았다. 때문에 그 일대를 웃보광이라고도 했고, 새로 생긴 마을이란 의미에서 새말 또는 새동네라고 했다. 추첨을 통해 택지를 분양받았는데, 둔지미 집을 철거하면서 나온 목재로 다시 집을 지어 전체적으로 지붕이 낮아졌다. 삶은 팍팍했지만 이주민들은 둔지미 마을 제당이었던 부군당을 옮겨와 음력 3월과 10월에 제사를 지냈다.
세월이 흐르고 외지인이 대거 유입되면서둔지미 이주민들은 보광동 원주민으로 동화됐다. 이주민 2세대는 보광동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들은 보광동 원주민과 다름없이 우사단, 공동묘지, 복숭아밭, 화장터, 솔밭 등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도시화되기 이전의 옛 보광동을 기억하고 있다.
# 사라진 마을 둔지미
둔지미는 조선 후기 둔지산 자락에 형성된마을이다. 영조 재위 시절 도성 밖에 설치한 한성부 남부 11방 가운데 둔지방에 속해 있었다. 1751년에편찬된 '도성삼군문분계층록'에 둔지방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8월 일본은 군용지로 계획한 용산 내 300만 평 대지에 보상금 20만 원을 책정했다. 그리고 즉시 이전을 통보했다. 둔지미도 이전 대상이었다. 주민들의 보상금 수령 거부와 이전 유예 요청은 이렇다 할 효과가 없었고, 일본의 군사기지화 정책에 따라둔지미 마을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군사기지에 터전을 빼앗긴 둔지미 사람들
둔지미 주민들은 두 차례나 강제 이주됐다. 1차 병영 공사가 진행 중이던 1908년 2월에서 5월 사이 둔지미마을 수백여 호가 강제 이주 대상으로 지정됐다. 주민들은 근방의 학부(學部) 소관 토지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내 용산기지를 기존 면적의 두 배 이상으로 확장하는 2차 병영 공사가 진행됐고, 주민들이 이전한 곳이 다시 군용지에 포함되면서 둔지미 사람들은 1916년 언덕배기 보광동 일대로 밀려났다.
# 한국 내 작은 미국이 된 용산기지
1945년 9월 일본군이 모두 철수하자 미 7사단이 조선군사령부청사를 차지했고, 용산기지에는 캠프서빙고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였다. 당시 주한 미군은 기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일본군 시절을 철거하지 않고 개조해 사용했고, 용산기지 안팎의 경계도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휴전이 되고 상시 주둔이 결정되자 미군은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용산기지를 정비해 장기 주둔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용산기지는 한국 내 작은 마국으로 서구 대중문화가 국내에 유입되는 창구이자 냉전식민주의 표상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주한미군의 눈에 비친 도시, 서울
1958년 5월 3일부터 1959년 6월 30일까지 미 8군 사령부 인사과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한 전 주한미군 폴 블랙이 복무 기간 중 촬영한 희귀사진 109점을 2017년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 건축물, 전차, 행인 등 서울의 일상적 풍경을 담고 있는 사진 상당수는 도시 서울의 변천사를 살피는 데 기초 사료로 가치가 있다.
기증한 사진에는 미 8군 사령부 본부 예배당, 야전병원 PX 미군위문협회(USO) 등 용산기지 내부 모습을 포착한 사진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보수공사 중인 미군 위문협회 사진은 1950년대 후반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 본격화되었던 용산기지 내부의 재건 작업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된다.
# 냉전 속에서도 뜨겁기만 했던 용산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으나 곧 미군과 소련에 의해 북위 38.5도선을 기눈으로 분할 점령됐다. 남한의 경우 미 육군 제24사단 예하 제7사단이 용산기지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약 3년 만에 미군정이 종료되면서 미군은 순차적으로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미군의 상시 주둔이 결정됐다. 전쟁에 참전했던 재8군은 서울이 수복되자 용산기지 재건을 추진했다.
용산기지 재건은 당시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태원 일대에 기지촌이 형성됐고, 기지에서 반출된 물품들이 남대문 도깨비시장을 통해 유통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또한 해방 이후 이북에서 월남했거나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이 용산기지 인근 남산 자락에 마을을 형성했다. 해방 후 미군정청이 접수한 지역이었지만 통제가 심하지않아 가능했던 일이다.
# 기지촌 그리고 양공주
1957년 주란미군의 외출과 외박이 허용되면서 용산기지 인근에 기지촌이 형성됐다.기지촌에는 주로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살았다. 양공주, 양색시 등으로 불린 기지촌 여성 들은 이태원, 해방촌, 삼각지, 한남동 등지에서활동했다. 특히 이태원 소방서 골목에 밀집되어 있던 클럽은 미군과 양공주가 즐겨 찾는 기지촌융흥의 중심이었다.
양공주들은 PX물품을 기지밖으로 반출해 부가 수입을 올렸다. 반출된 PX물품은 나까마라고 부른 중간상인을 통해 남대문 도깨비시장으로 유입됐다. 물자가 부족했던 시기에 미제 물건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없어서 못 팔 정도 로 인기를 끌었다.
# 삶은 팍팍했지만 이름 만큼은 호기로왔던 해방촌
해방촌은 오늘날 행정구역상 용산구 용산동1가와 용산동2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해방 후 실향민, 해외에서 건너온 동포와 같이 돌아갈 곳 없는 이들이 이곳에 모여 판잦집을 짓고 살았다. 해방과 함께 형성된 동네라 하여 사람들은 이 일대를 해방촌이라고 불렀다.
남대문시장을 근거지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고, 일부는 좌판을 깔고 동네장사를 했다. 소설 '해방촌 가는 길'. '오발탄', 영화 '박서방' '혈맥' 등 1950-60년대 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작품 속에서 해방촌은 산비탈에 초라한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촌으로 묘사됐다.
# 구불구불 산비탈에 뿌리내린 해방촌 사람들
1950년대 해방촌주민들 상당수는 야미 담배라고 부른 가짜 답배 제조로 돈을 벌었다. 전부의 규제가 시작되면서 1960년대부터는 일명 요꼬로 불린 편물업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가내 수공업으로 스웨터를 만드는 일이었다. 한때 해방촌에서 생산된 니트가 전국 공급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편물업이 성행했고, 1970년대 해방촌 상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